그저 안줏거리로만 넘겨버릴 수 있다면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 한달한달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해야할 일들, 해내야만 하는 일들,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쌓여 나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서있는 길이었다. 과거에 이 길을 선택한 나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선택을 지금와서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의 나는 결국 과거의 최선이 모여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때의 결정은 그 때의 내가 수집한 정보와 예측을 통한 최선의 결론이었다. 그 정보와 예측이 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 정확했으면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혹은 내가 외면했던 정보가 맞았을 수도 있지만, 이제와서 후회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면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만약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된 경우. 내가 고민했던 플랜B를 실행한 누군가가 더 잘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하는 경우. 코로나19같은 저항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치는 경우. 어쩌면, 내 예상되로 잘 되었을 경우에도, 그 순간의 선택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과거의 나는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고, 그 기억을 불러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지나간 날들에 대해 만약을 붙이고, 상황을 가정하고, 형편을 과장하며 현재를 재구성해본다. 이만한 안줏거리도 없다. 나는 술은 못 마시지만, 이런 얘기에는 빠질 수 없다. 지나간 얘기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 한두명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후회로 가득한 인생을 위로해주는 일종의 간호사라고나 할까.
가볍게 살아보려 한들 가벼운 인생이 아니더라. 세상은 나 혼자 살아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지켜내려면, 혹은 곁에 계속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때문에 혼자를 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 혼자 살아가려 하더라도, 그 노력이 감당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혼자 보단 몇 사람 더 만나서 그를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혼자를 택하는 것과 무관하게, 마음이 단단한 사람들은 삶을 더 가볍게 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그들은 본인들이 살아오면서 택한 수많은 일들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라며 다시 돌아간대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맞는 말이다. 지금보면 더 나아질 수 있었을 것만 같고,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때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희미해지는데 이제와서 더 나아질 수 있었다는 말은 삶만 무겁게 만들 뿐, 아무 의미가 없다.
최고의 복수는 내가 잘 사는 것이라는 말 처럼,
내가 잘 살면 후회도 가벼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