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

5-1, 5-2 통합

by KJ

주얼리 공방에 들어왔다. 문이 닫히며 종이 울렸다. 실내는 조용했고, 창가 쪽 작업대들에는 바이스로 고정된 탁상등이 켜져 있었다. 내가 사용할 작업대 위에는 줄과 톱, 핸드피스가 같은 방향으로 정리돼 있었다.


이번 작업은 반지였다. 너비가 넓은 밴드 형태에 표면에 세로선을 반복해서 넣을 계획이었다. 반지 특유의 제작 공정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었다.


작업대 위에 파이프형 왁스가 있었다. 손에 쥐자 매끈하면서도 단단했다. 왼손에 왁스를 두들겨보니 둔기와 같은 밀도였다.


사용할 쪽의 평탄화가 필요했다. 길쭉한 왁스를 왼손으로 작업대 위에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줄을 잡고 원을 그리며 표면을 정리했다. 이전 수강생이 잘랐던 왁스의 표면은 조금씩 고르게 되었다. 줄을 세밀한 것으로 바꿔 잡고 평면이 될 때까지 정리했다.


톱질을 할 차례였다. 실제 반지의 폭보다 조금 넓게 캘리퍼스의 폭을 정하고, 두 날 중 한쪽을 왁스의 끝에 걸었다. 이렇게 한 후 왁스 주변에 돌려 그어 자를 곳을 표시했다. 톱질의 정밀함은 칭찬받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반지보다 조금 크게 잘라낸 왁스 조각의 나머지 면을 정리했다. 앞서 했던 줄질을 반복하니 양쪽 면이 모두 정리되어 반듯하면서 두꺼운 토큰 모양이 되었다.


이제 안쪽과 바깥쪽을 갈아내서 두께를 맞출 차례였다. 안쪽을 갈아내는 데 사용할 도구가 등장했다. 여섯 방향의 칼날로 이루어진 별 같은 단면이었다. 이 육각별 단면이 끝부분은 좁게 시작하여 손잡이에 가까울수록 굵어지는 구조였다. 이 도구를 안쪽에 끼우고 살살 돌렸다. 깎여나가며 내경이 조금씩 커졌다. 도구 전체가 철제여서 두 손가락으로 돌리며 다루기에는 꽤 묵직했다.


왁스를 양면으로 뒤집어가며 도구에 끼우고 안쪽을 깎아냈다. 이따금 왁스를 반지 내경을 측정하는 고깔 모양 도구에 끼워서 측정하고, 부족함을 확인 후 깎는 것을 몇 번 반복했다. 목표인 23호가 되었다. 내 왼손 중지의 둘레였다.


외경을 깎는 것은 익숙한 방식이었다. 몇 가지 줄로 왁스를 돌려가며 표면을 갈아냈다. 마지막에 고르지 못한 표면은 때수건으로 문질렀더니 매끈해졌다.


선을 긋는 일만 남았다. 반지 바깥쪽 면의 여덟 방향에 I, II, III, II, I, II, III, II의 세로선 패턴을 긋는 것이 목표였다. 여덟 방위에 정확히 세로선 문양을 위치시키고, 각 선의 간격 또한 일정해야 했다. 시계 관련하여 못 이룬 것에 대한 무의식이 반영된 듯했다.


먼저 'I'의 세로선 하나를 그어 봤다. 5밀리미터 조금 넘는 폭의 왁스와 조각용 펜을 눈 가까이 가져오고, 펜을 조심스럽게 아래로 그어 선을 그렸다. 선이 아래로 이어지다가 오른쪽으로 조금 경로를 이탈했다. 세밀한 줄로 생채기를 지우고 때수건으로 마무리했다.


참았던 숨을 '후' 하고 길게 뱉어냈다. 세 번쯤 실패하고 나니, 이대로는 완성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선생님과 다른 강습생은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개수대에 손을 씻었다.


집에 와서 화면 앞에 앉았다. 대화 주제는 손놀림이 무딘 나의 수공예 적응 방안이었다. 몇 마디 답변이 떴으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쓰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눈을 치켜뜨고는 새로운 얘기를 썼다.


"선을 바르게 긋도록 도와주는 틀을 만드는 거 어떨까?"

"3D 프린터를 샀으니 활용해 봐야지."


답변 내용에는 '지그'라는 단어가 있었다. 반복되는 작업을 돕는 보조 도구라고 했다. 내 작업에서 선 긋기와 같이, 맨손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부분에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류의 명칭으로 이해했다. 3D 프린터에서 출력하려면, 그 형태를 CAD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몇 번 문답을 주고받으니, 설계 프로그램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익숙지 않은 이름들을 보다가 스크롤을 멈췄다. 입력창으로 내려왔다.


“내가 대화에서 그간 보여준 성향을 감안해서, 내게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추천해 줘”


여러 이름 중 하나에 설명이 길게 붙어 있었다. 여러 치수를 입력해서 형태를 만들 수 있고, 복잡한 수정 중 이전 상태로 쉽게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Fusion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정밀함을 추구하는 나에게 맞는 것이라고 했다.


다운로드가 끝났고, 동의 화면이 몇 번 지나갔다. 설치가 진행되는 사이 공방에서 애쓰던 것이 떠올랐다. 펜 끝이 옆으로 밀리던 순간. 줄로 지웠던 흔적.


사람과 컴퓨터로 만드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봤다. 컴퓨터가 만들면 설계자의 의도가 정확히 반영되어 대칭과 비례가 맞는 물건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만들면 그보다 덜 정밀하지만 '사람이 만들었다'라는 게 느껴지는 조형감을 갖게 된다. 이런 의도되지 않은 부조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는 사이 설치가 끝났다.


바탕화면에 아이콘이 하나 생겼다. 클릭하니 회색 화면이 먼저 나타났고, 수십 개의 버튼과 모눈종이와 같은 3차원 좌표계를 가진 빈 공간이 자리 잡았다.


이것으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 AI에게 물었다. 3차원 입체 설계를 위해서는, 바닥 단면을 2차원으로 그린 후 그걸 Z 축으로 키우는 방법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선을 가이드할 지그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 생각했다. I, II, III의 선 패턴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하니, 단면이 반원 형태인 마스크에 선 패턴이 뚫려 있는 형상이 떠올랐다. 용접공들이 사용하는 마스크와 같은 윤곽이었다.


먼저 굵은 선으로 그린 반원 형태의 단면이 필요했다. 큰 원과 작은 원을 그렸다. 두 개의 동심원을 절반으로 잘라내고, 두 반원의 끝을 연결하여 폐곡선을 만들어 냈다. 이를 Z 축으로 키우니 마스크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 모형에 선 패턴을 타공 했다. 계획했던 외형이 만들어졌다. 필요한 기능에 대해 문답한 대화창으로 돌아와 보니, 스크롤바가 마우스 포인터로 잡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이제 지그 도면이 준비되었다. 프린팅 환경설정 또한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대화는 Fusion을 이용한 설계만큼 더 이어졌고, 스크롤바는 훨씬 작은 크기로 줄어 있었다. 출력 버튼을 클릭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다. 프린터의 유리창을 안쪽을 보니 주황색 마스크 모양이 놓여 있었다. 따뜻한 그 도구는 엄지손가락의 한쪽을 가릴 정도의 크기였다. 그것을 가죽공예 수업 때 만든 카드지갑 안에 넣고, 카드지갑을 백팩 앞주머니에 넣었다.


새벽 1시였다. 돌아오는 아침에는 가죽공예 수업이 있었다. 휴대폰의 알람 반복 설정을 3회에서 5회로 바꾸고 침대에 누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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