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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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J

거실로 갔다. 작업 테이블 앞에 섰다.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닥에 흩어진 자들이었다. 30센티부터 긴 자까지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금속 자와 플라스틱 자가 뒤섞여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하나를 집으려 손을 뻗으면 다른 자가 함께 움직이며 '챙그랑' 소리가 났다.


자를 벽에 세워두는 방식도 써봤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누웠다. 바닥에 닿은 끝이 미끄러지며 결국 다시 바닥으로 퍼졌다. 긴 자일수록 쓰러지는 반경이 컸다. 자 하나가 넘어질 때마다 주변의 다른 자들과 함께 쓰러졌다. 작업 공간이 산만해지는 원인이 분명했다.


테이블 위 잡동사니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자들을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자는 늘 손 근처에 필요했지만, 거치하기 까다로웠다. 자는 세워져야 했다. 한눈에 길이가 구분되고, 손을 뻗으면 바로 집어 들 수 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자가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길이 별로 모아놓고 수납 가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를 수납한 상태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바닥이 넓어야 했다. 또, 여러 길이의 자를 하나의 통에 몰아넣는 방식은 작업 능률이 떨어질 것이었다. 각 자가 각자의 자리를 가져야 했다.


구조를 먼저 생각했다. 세 곳의 자를 수납할 길쭉한 슬롯, 즉 구멍을 갖는 하나의 거치대. 60센티미터 자를 수납하고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널찍한 바닥면이 필요해 보였다.


3D 프린터에서 출력하기 좋은 형태는 바닥과 상단이 분리된 모양이었다. 바닥은 무게를 받아내는 것이 주 임무였다. 상단은 자들을 분리해 세워주는 역할을 하는 구조였다. 한 덩어리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안정성을 생각하면 분리 설계가 더 합리적이었다.


바닥의 구체적인 모양을 생각했다. 상단 구조물을 바닥 위 정위치에 조립할 수 있도록 표식이 있어야 했다. 그걸 돌출되는 형태의 정면이 낮은 부드러운 사면으로 만들면 자를 꽂을 때 윗부분이 뒤로 누워 안정적인 모양이 될 것이었다. 이런 세 곳의 사면은 상단과 합체할 때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이점도 있었다.


슬롯들의 입구 높이도 고민이 필요했다. 세 종류 길이의 자를 안정적으로 꽂기 위해서는 앞에서는 짧은 자를 수납하고, 뒷칸에는 60센티미터 자를 꽂을 수 있는 구조가 좋아 보였다. 노출된 세 개의 슬롯 입구들은 전체가 매끈한 사면으로 설계할 것이었다.


대화창을 열었다. 요구사항을 정리해 물었다. 바닥 크기와 돌기 높이에 대한 질문을 몇 번 주고받았다. 자 두께 기준으로 돌기의 적정 간격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답변받은 수치에 따라 배치했다.


설계 화면을 열고 바닥부터 그렸다. 판의 면적을 넉넉하게 잡았다. 자들이 한쪽으로 쏠려도 넘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낮게 두었다. 두께를 늘려 무게감을 확보했다. 화면 속에서 바닥 판을 회전시키며 가장자리 두께를 조정했다. 손으로 눌렀을 때 휘지 않는 정도를 기준으로 삼았다. 조립된 구조물에서 자들이 안정적으로 뒤로 기대지도록, 앞은 낮고 뒤가 높아지는 사각 돌기도 3개 만들었다.


상단 구조물도 설계했다. 자들이 들어갈 자리를 나눴다. 그 구멍들의 간격은 자 두께보다 여유 있게 잡았다. 너무 좁으면 넣고 빼기 불편하고, 너무 넓으면 꽂아놓은 자가 심하게 기울 것이었다. 앞서 생각해 놓은 형상에 따라 X, Y, Z 축으로 너비와 부피를 늘려갔다.


출력을 시작했다. 몇 시간 후 바닥 부품이 나왔다. 평평한 판 위에 층이 하나씩 쌓였다. 적층 결이 일정하게 올라갔고, 판은 보기에 점점 단단해졌다. 출력이 끝난 뒤 손으로 들어보니 소형 가구와 같은 무게가 느껴졌다. 이어서 밤에 출력을 맡기고 일어나니 상단 구조물이 출력됐다. 슬롯들이 하나씩 형성되며 3개의 내부 공간이 생겼다.


두 구조물을 양손에 쥐고 맞춰 봤다. 3개의 돌기 부분에 상부를 끼워 넣으니 위아래가 정확히 맞물렸다. 분리한 후 접착제를 발라 다시 붙였다. 10분쯤 지나 확인해 보니 손으로 밀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바닥 판이 무게를 잡아주고, 상단 슬롯이 자리를 잡아주는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자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먼저 짧은 자를 앞쪽 슬롯에 넣었다. 자가 들어가며 플라스틱이 부딪히는 '또각' 소리가 났다. 다음으로 긴 자들을 30센티미터와 직각자 위주로 두 번째 슬롯에 세웠다. 60센티미터 자들의 위치는 맨 뒤였다. 모든 자를 꽂고 나니 멀리서도 존재감이 느껴졌다. 거실에 늘어져 있던 대여섯 개의 자들이, 바닥면적의 가로와 세로가 한 뼘 정도인 한 공간으로 모였다.


60센티미터 자를 서너 번 거칠게 꽂아 봤다. 넘어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로 물러서서 발코니의 등을 켰다. 노란빛을 받으며 꽂혀 있는 자들을 잠시 지켜봤다. 서재로 들어갔다.


메시지들이 도착해 있었다. 회사에서 한때 같은 팀이었던 형들과 친구들이었다. 서로 근황을 물으면서, 나에게는 먼저 연락을 하라는 타박이 주된 내용이었다. 모두 저녁에 참석할 수 있는 날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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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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