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사서 한 생각, 나는 뭘까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에서 주인공 미소는 하룻밤 신세 지기 위해 맨 처음 문영을 찾아간다. 문영은 단호하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 여전하네.”
여전하다. 나는 영화 속에선 좋지 않은 어감으로 표현된 이 말을 좋아한다. 나에게 ‘여전하다’라는 말은 내가 일관성 있게 살고 있다는 것, 그 노력에 대한 확인이었다. 나만의 기준을 갖고 삶을 살려는 것. 이것은 쉽게는 어떤 것이 좋고 싫음에 대한 취향, 또는 삶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기준과 같은 가치관을 찾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경험해보지 않는 새로운 상황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내게 모르는 질문이 던져질까 늘 두려웠다. 인생에서 던져지는 모든 질문에 정답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정답만 알 수 있다면 매 순간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 텐데. 남의 정답을 알 수는 없고, 그렇다면 나의 정답을 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그 글들이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더라도 고치고 다듬어서 나만의 방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소는 여러 친구의 집을 전전하다 록의 집까지 오게 된다. 그곳에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미소는 친구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도 염치가 없지 않았다. 없는 형편에 늘 계란 한 판을 선물로 준비했고,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사노동으로 숙식의 대가를 치르려 했다. 사회적 잣대에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취향을 버리고 사는 친구들이지만 미소는 단 한 번도 그들의 결정을 비난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세상의 주류가 아닌 것을 선택한 미소를 그들이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취향은 강요할 수 없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 기준에서 미소는 돈을 벌기 위해 절실히 일하지도, 돈을 아끼지도 않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바로 위스키와 담배. 새해 첫날 가격이 인상된 위스키를 마시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미소의 표정이 묘하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위스키를 즐기면서도 단 한 번도 크게 웃지 않는다.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아마도 취향이라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긴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자. 여행지에 가져갈 가방에 나는 무엇으로 채울까. 여행 내내 빠뜨리고 가져오지 않은 물건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려면 나에게 중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누구인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미소의 텐트처럼 자신의 것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여전한 사람이고 싶다. 나에게 미소의 위스키와 담배는 과연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