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사서 한 생각, 나는 뭘까
내가 뒤척이며 내는 사각사각 이불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 밖에서 뚫고 들어오는 아침햇살 때문인지, 여행 첫날의 설렘 때문인지 오랜만에 늦잠 자려는 계획을 접고 일어나 씻으러 갔다.
나는 어제 제주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하는 혼자 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으나 점심때쯤 도착해서 맛있게 혼밥을 하겠다는 계획은 저가 항공이 늘 그렇듯 비행기 연착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후 늦게 도착해서 렌터카를 픽업하고 나니 어디 들릴 틈도 없이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저녁만큼은 미리 봐둔 근사한 식당에 가서 먹겠다고 했던 계획도 실패. 사람이 많지 않은 비수기 제주는 늦어도 7시엔 문을 닫는 가게가 많았고, 그다음 날인 수요일도 정기휴무인 곳이 대부분이란다. 정말 도시 촌년이 따로 없다.
씻고 나와 짐을 챙기고 나니 거실 테이블에 아침 조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무 쟁반에 정성스럽게 차려낸 토스트와 향이 좋은 커피.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는 화려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배려 있게 갖춰져 있는 방, 제주가 느껴지는 집 앞마당, 아기자기한 소품이 놓인 거실과 책꽂이의 느낌 있는 책들까지도 하나로 느껴질 만큼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꼭 오랫동안 숨겨놓고 찾아오지 않았던 내 방처럼 편하게 지낸 하룻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제주 여행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독립서점으로 달린다. 커피를 하기에 이른 시간이지만 서점에서 맛볼 아몬드라떼의 맛이 너무나도 궁금했고, 책 속에 그려진 책방의 모습이 너무 아른거려서 다소 무리한 동선이지만 그곳으로 향해본다. 이것이 혼자 여행의 장점 아니겠는가. 누구라도 같이 오면 절대 할 수 없는, 합리적인 동선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여행.
작고 예쁜 학교 옆에 자리 잡은 작은 서점. 계획대로 아몬드라테를 시키고 한쪽에 자리 잡은 책방으로 가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읽기 좋은 책들과 예쁜 쓰레기들을 구경하다 가방에 들어 있는 책 세 권이 눈에 밟혀 그냥 자리에 앉았다. 마침 나온 아몬드라테를 한 모금 하니, 오랜만이었다. 온전히 커피 마시며 행복했던 적이,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했던 적이.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을 울컥하며 라테를 홀짝였다.
행복한 기분을 안고 한라산 1,100고지로 향한다.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본 한라산,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갈대들, 끝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는 건지,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한라산만 간단히 찍고 제주도 남쪽을 향해 위미리 동백 숲으로 간다. 동백꽃이 있어야 할 골목에 꽃은 다 지고 나무만 있어서 주변에 물어보니 입장료를 받고 동백꽃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있단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동백꽃이로군.’ 그래도 이곳까지 왔는데 한번 봐야 하지 않냐며 물어물어 가보니 모두 끼리끼리 인생 사진을 남기겠다고 난리다. 급 외로워진다. ‘여긴 오지 말걸. 아까까지 좋았는데.’ 다음엔 누구와 같이 오겠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발길을 옮겼다.
오늘 일정의 공식적인 마지막 코스, 친구가 추천한 파스타 가게에 도착했다. 내 마음을 빼앗을 만한 예쁜 쓰레기가 여기에도 한가득. 일단 오늘 하루 너무 굶주렸기에 알리오올리오 파스타와 유자 에이드를 주문하고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아 바다를 바라본다. 제주에 와 가장 가까이서 본 바다. 너무 가까워서 큰 파도가 치면 발목까지 젖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른 목에 먼저 나온 유자 에이드를 공급하고 한숨 돌리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밀가루 종목에 취약한 나지만 파스타만큼은 자신 있게 한 그릇 뚝딱해치운 후,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향했다.
오늘 묵을 숙소는 제주 남쪽 바닷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1인실이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기가 어려운 남쪽은 도미토리형 게스트하우스뿐이라 오늘 밤은 3명의 룸메들이 생겼다. 샤워하고 아직 온기가 없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끄적여본다. 이불 속이 내 온기로 천천히 데워진다. ‘내일은 여기와 여기를 가고, 이곳에서 저녁을 먹어야지.’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