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005 사서 한 생각, 달콤 쌉싸름한 연애

by 나리

나의 최애 드라마 중 하나인 ‘연애시대’에서 주인공 동진과 은호는 이혼한 사이지만 둘이 자주 다니던 곳에서 만나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며 친구처럼 지내는 다소 엉뚱한 옛 부부다.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운 은호는 라디오 상담 프로그램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자 이런 충고를 듣는다.


“그 남자의 엄마가 돼라.

그 남자의 엄마가 되어 그의 단점을 감싸 안아라.”


나에게도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바라만 봐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던,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싶었던 그런 사람.


때는 2007년 여름, 1년 중 가장 뜨거운 7월에서 8월 방학 동안 이루어지는 집짓기 시즌이었다. 50여 명의 20대 청춘들이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며 낮에는 뜨거운 볕 아래서 노동을 하고 밤에는 낮의 고된 노동을 달래며 음주를 즐기던 곳, 커플 생성 확률이 월등히 높은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해외여행으로 2주 늦게 합류하여 어색해하던 그를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했나 보다. 점심때나 하루 일정이 다 끝난 저녁 시간이 되면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그가 먼저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라며 재벌 2세도 아닌 주제에 재벌 2세가 할법한 말로 나에게 고백을 해왔고, 그렇게 나도 커플이 되어 집짓기를 졸업했다.


그때의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20대의 마지막을 살아내고 있었다. 처음엔 나와는 달리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해내는 그의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자신감 넘치던 그가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힘들어할 때마다 나는 무한한 이해로 받아줬고, 소심했던 내가 쉽게 잡히지 않는 일로 좌절할 때마다 그는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던 위로를 주었다. 뜻대로 되지 않던 상황을 견디지 못한 그가 먼저 이별의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어쩔 수 없었던 우리의 상황을 탓했었다.


그런 충고를 들은 은호는 고민 끝에 용기 내어 동진에게 고백하기로 한다. 다시 한번 그 남자의 엄마가 되어보겠다고. 은호가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자리에 동진이 은호를 골탕 먹일 생각으로 남자만 소개하지 않았어도 둘을 잇는 빨간 실 따윈 엉키지 않았을 텐데. 서로의 속을 태우며 먼먼 시간을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그 장면 끝에 은호는 이런 내레이션을 한다.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졸업 후 외국에 머물면서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았다. 서로에게 감정이라는 게 남아있어도 재가 되었을 법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 번씩 그의 만나면 일주일 동안은 혼자 끙끙 앓았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을 때 나도 결심을 했다. 우리의 관계를 어떤 방향이든 정리해 보겠다는 결기로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우리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느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노. 그때의 우린 너무 어렸고 더는 쉽게 상처받던 예전의 우리가 아니기에 다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지금의 우린 더 이상 그때의 우리가 아니었고, 지금의 우린 그때와 또 다른 새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걸 6년이나 지나서야 깨닫게 되다니. 깨달음은 정말 늦구나.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크리스마스 때 그가 선물로 준 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이라는 책을 찾았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헤어질 때까지 쓴 편지글 형식의 책에서 남자는 마지막으로 여자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헤어짐이 있어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을 믿으며.”


우리 서로 다시 만날 기약으로 헤어짐을 고하진 않았지만, 그에게도 나에게도 앞으로 다가올 사랑은 결코 늦은 깨달음 따윈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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