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티비 <파친코> 리뷰
애플티비에서 제작한 드라마 <파친코>는 이민진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4대에 걸친 한인 이민 가족의 삶과 꿈을 그려낸 드라마다. 소설과 드라마 중 어떤 것을 먼저 볼지에 관한 고민이 있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드라마를 시작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파친코>는 근래 내가 본 드라마 중 가장 웰메이드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스토리, 연출, 촬영, 편집,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까지도 무엇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 <파친코>는 스스로를 대하 드라마라고 칭하는 드라마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대하 시대극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과거와 더 먼 과거를 오가는 세련된 편집과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시청자들을 한 가족의 삶 속으로 온전히 끌어당긴다.
1. 살기 위해 애썼던 이들을 위해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억척같이 살고 싶은 기라."
1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지닌 삶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파친코>가 억척스럽게 생존과 번영을 꿈꾸는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성을 지닌다고 느꼈다.
<파친코>는 결국 '삶'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살아내기 위해 억척스럽게 지키고 버텨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선자의 부모님에게서 시작해 쭉 이어지는 가족의 뿌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조들이 살아왔던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파친코>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파친코'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돈을 주고 구입한 구슬을 기계 장치로 튀겨 구멍에 넣은 후 그림의 정해진 짝을 맞추면 일정 액수의 돈이 나오는 도박 기기.'이다. '파친코'는 겉으로만 보면 구슬을 넣은 후 정교하게 조종하여 돈을 따는 게임 같아 보이지만, 실은 아무리 잘 조종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한정되어 있다. '파친코' 역시 계산과 통제 아래 있는 도박 게임일 뿐인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은 '파친코'와 닮아 있다. 특히 선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떠나 살아남아야 했던 재일조선인이었고, 고단하고 힘겨운 시대 속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파친코>라는 드라마의 제목은, 단순히 노아가 하는 사업을 넘어 선자의 삶,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2. 미국에서 제작된 일제강점기 배경 드라마
한국 배우들이 나와 한국어로 대사를 하지만, <파친코>는 애플의 자본으로 제작된 미국 드라마다. 드라마를 보기 전부터 이 부분은 <파친코>의 굉장한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기 때문에 탄탄한 자본과 큰 스케일이 뒷받침될 수 있었을 뿐더러 애초부터 주요 타겟층을 미국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과거의 잔재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탄탄한 원작이 있고 연출을 맡은 두 감독과 총괄 프로듀서가 한국계 미국인이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제작되는 드라마가 과연 일제강점기의 현실과 그 잔재까지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조금 있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제대로 일제강점기를 조명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할머니가 된 선자가 한국으로 돌아와 복희 언니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위안부'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복희 언니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와 복희 언니가 지내고 있는 모습에서 그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지레짐작할 수 있다. 또한 7화에서는 젊은 시절의 한수가 보고 겪었던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을 배경으로 다루며,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막을 통해 해당 역사에 대한 사실을 정확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3.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오프닝
https://youtu.be/1GgKXR_J-ww
8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파친코>를 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오프닝 건너뛰기'를 누르지 않았다. 물론 오프닝 크레딧이 생략되어있는 회차도 있었지만, 모든 OTT 서비스의 모든 콘텐츠에서 '오프닝 건너뛰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즘으로서는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The Grass Roots라는 미국 록밴드의 'Let's Live for Today'라는 음악에 맞춰 배우들이 자유롭게 웃으며 춤을 추고 즐기는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게 만든다. 배역에 몰입한 상태로 춤을 추는 배우들의 자유로운 표정과 몸짓, 세련되고 감각적인 오프닝 크레딧은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시청자들을 몰입시킨다.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나 스토리, 인물들의 서사까지도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의 본 내용과 대비되는 분위기의 오프닝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도 있다.
지금껏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흥미로웠던 오프닝 크레딧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연출진 및 프로듀서진의 인터뷰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오프닝에 노래에 맞춰 배우들이 춤을 추자는 의견은 총괄 프로듀서 수휴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다음은 오프닝에 관한 <파친코> 제작진의 인터뷰다.
"오프닝 시퀀스는 각본 단계부터 포함하고 구상했다. 오프닝 시퀀스가 중요하다. 시청자들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요소다. 롤링스톤즈 곡이었는데 저작권 확보가 어려웠다. 배우들이 어떤 노래가 깔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춤을 췄다.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각각 화에서 시청자들이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같은 것이다. 일종의 선물이다."(수휴)
"이 작품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와도 같은 시리즈다.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제 3의 대화같다. 배우들이 연기한 인물들이다.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내면의 흥을 표
현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다. 해방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의 감춰진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구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마이클 엘렌버그)
출처: https://www.sportsw.kr/news/newsview.php?ncode=1065592181163049
<파친코>의 오프닝 속에서 제작진들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의 의미도, 해방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는 창구의 의미도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이 글을 본 이후에 파친코를 시청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쯤 '오프닝 건너뛰기'를 누르지 마시고 매력적인 오프닝을 감상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4. 드라마를 더욱 빛낸 연출과 열연
드라마 <파친코>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준 데는 그 완성도를 높여준 연출과 촬영, 그리고 편집의 힘이 있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수준 높은 드라마의 영상미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관에 앉아 큰 화면으로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촬영 뿐만 아니라 편집 역시 그렇다. 젊은 선자의 이야기, 할머니가 된 선자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서로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과거와 더 먼 과거를 오가는 연출 속에서 우리는 그 사이를 관통하는 삶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배우들의 열연 역시 빛났다. <파친코>에는 윤여정 선생님과 이민호 배우를 비롯해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나온다는 걸 모르는 상태로 마주한 배우들이 많아 작품을 보던 중 반가움을 느끼는 일도 잦았다. 젊은 선자를 연기한 김민하 배우와 이삭을 연기한 스티브 상현 노 배우는 <파친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배우들이었는데, 정말 보석 같은 배우들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김민하 배우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선자 그 자체였다.
어린 선자를 연기한 전유나 배우, 젊은 선자를 연기한 김민하 배우, 할머니가 된 선자를 연기한 윤여정 배우가 <파친코> 시즌1의 시작부터 끝까지 탄탄하게 중심을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덕분에 더욱 더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었다.
5.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선자들에게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땠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지치지 않고 강인하며 흥이 많은 데다, 생존을 위해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관없다'라고 쓴 것입니다." - 이민진 작가
출처: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60474_35744.html
역사는 우리를 실망시켰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인상적인 책의 첫 구절에 대해 원작의 작가인 이민진 작가가 남긴 인터뷰다.
<파친코>의 선자는 역사에 남을 정도로 위대한 일을 했거나, 모든 후손이 기억하는 인물은 아니다. 선자는 그저 고단한 시대를 버티며 살아낸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럼에도 선자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씩씩한 인생을 살았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파친코>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평범하지만 강인하고, 평범하기에 더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2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식민 지배 때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중 약 80만 명은 일제에 의해 노동자로 끌려갔다.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약 60만 명은 일본에 남아 무국적자가 됐다. 이 이야기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견뎌냈다.
<파친코> 8화 中
<파친코> 시즌1의 엔딩 시퀀스는 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선자의 모습이다. 감옥에 가게 된 이삭 대신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무작정 시장으로 향해 목청을 높여 김치를 파는 선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대견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한편, 괜스레 코끝이 찡해져 오기도 한다. <파친코>는 이 엔딩 시퀀스 하나로 <파친코>가 왜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선자들에게 바치는 이야기인지 설명했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흘러가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래왔듯 우리는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파친코>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즌1의 종영과 함께 시즌2의 제작이 확정된 지금, 가족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드라마 <파친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