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리뷰
"나는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거야."
영화 <소공녀> 中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우리는 미소가 이 세 가지를 사랑해 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에게 빌린 쌀이 비닐봉투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로 담배를 입에 물고, 가사도우미 일이 끝나고 바로 술집에 가 혼자 위스키를 마시는 미소의 모습에서 말이다. 난방조차 잘 되지 않는 미소의 집에선 옷을 벗다가도 추위를 느끼는 바람에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기도 어렵지만, 그럼에도 미소는 남자친구와 함께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행복하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미소의 일상이 뒤바뀌어버린 건 담뱃값과 집값이 함께 인상되면서부터다. 들어오는 수입은 똑같은데, 나가는 돈이 많아져버린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담배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미소는 결국 집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당장 다음 날 밀린 월세를 내고 방을 뺀 미소는 대학 시절 함께 밴드부를 하며 열정을 나눴던 친구들을 찾아가는 여정, 혹은 미소만의 여행을 떠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중 일부는 담배를 위해 집을 포기해버린 미소가 바람이 든 것 같다며, 이런 건 민폐라며 미소를 비난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 겉에는 친구의 애정과 걱정이라는 번듯한 포장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진심 어린 걱정과 마음이 아니라는 것은 보는 우리도, 말을 하는 그들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만인 친구가 반가운 것과 별개로 방 하나를 흔쾌히 내어주는 일이 누구에게나 쉬운 것은 아님을 알기에 그들이 잘못 됐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미소를 반갑게 맞이한 친구들은 대부분 지치고 버거운 현실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미소가 머무는 하룻밤은 오랜만의 포근한 위로와 애정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미소가 가진 '가사도우미'라는 직업이 남들에게 위로가 되고 따뜻함이 되는 직업으로 그려졌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미소가 두 번째로 찾아갔던 키보드 현정이와의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방 안에서 나란히 누워 함께 보냈던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는 둘의 애틋하고도 그리운 표정이 참 인상적이었고, 답답한 현실을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는 현정이가 그 순간만큼은 편안하고 행복해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소공녀>는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청춘들의 삶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는 동안 현실 속 판타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의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러 찾아갔던 미소가 오히려 그들을 보듬고 위로하며 따뜻한 집밥을 차려주고 다음날 씩씩하게 떠나는 모습이 수호 천사처럼 느껴져서일까. 어쩌면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티며 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친구들 속에서 보여지는 미소의 캐릭터 자체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백발의 미소를 보여줄 때 잘 드러나는 잔잔하고 몽환적인 영상미와 친구 집에서 밥을 해주는 미소를 보여줄 때의 화면의 따뜻한 색감이 동화적인 느낌을 자아냈다고도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로케이션들이 정말 좋았는데, 영화의 초반부 등장했던 미소의 집 외관이나, 다양한 특색이 있는 친구들의 집, 미소가 걷는 길거리와 그녀가 위스키를 마시는 술집 등 하나하나의 로케이션이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살리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미소는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이나, 번듯한 집은 없지만 당장 먹을 게 없어도 친구 집에 찾아갈 땐 계란 한 판을 사들고 가고, 자신의 밥조차 챙기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 집밥 한 상을 차려줄 수 있는 따뜻함과 여유를 지녔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던 집의 주인이 더이상 미소를 쓸 수 없다며 울어도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줄 수 있는 진심을 가졌다. 집과 직장을 가진 친구들에겐 없는 것들이다. 티 없이 맑고 따뜻한 미소의 미소는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집 역시 그런 존재다. 그러나 영화 <소공녀> 속에는 집이 없어도 행복한 미소와 집이 있어도 슬프고 불행한 친구들이 나온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가져야 할 건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것이 정해져 있긴 할까?
물론 누군가는 내일의 계획 없이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미소의 삶을 무책임하거나 한심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처음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도 은연 중에 어떠한 대책도 없이 마음 편하게 당장의 오늘을 살아가는 미소가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곧 우리에게 남의 삶을 재단할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하고 반성하게 됐다. 영화 속에서 다짜고짜 미소의 삶을 마음대로 판단하며 결혼을 하자던 한 명의 친구처럼, 미소가 폭력적이라고 했던 그 시선처럼 어쩌면 나도 미소의 삶을, 다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누구의 삶도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친구들의 삶은 미소보다 덜 흔들리고 더 안정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집은 없어도 취향은 있다고 말하는 미소가 부러웠다. 남의 시선과 평가보다 나의 행복과 취향이 더 중요한, '남들처럼 잘 사는 삶'을 좇지 않는 미소가 부러웠고, 그래서 더 미소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위태롭고 고단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영화는 담배를 들고 있는 백발이 된 미소의 뒷모습과, 한강 다리 아래 빨간 텐트를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미소는 변함없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관객들이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미소는 스스로에게 직업과 집이 중요하지 않은 만큼 다른 이들을 바라볼 때도 그 사람이 가진 것이나 개인의 특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본다. 스스로의 취향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꿈도 소중하다. 남자친구도 포기해버린 남자친구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미소의 모습이 그렇다. 남의 시선에 기죽지 않지만, 남의 인생도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기에 미소는 더욱 멋있다.
<소공녀>는 꼭 리뷰를 적고 싶은 영화였다. 늘 인생영화를 묻는 말에 대답을 꺼렸다.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들은 있었지만 딱 한 영화를 고르는 게 어렵기도 했고, 또 언젠가 운명처럼 만날지도 모를 인생영화를 위해 자리를 남겨두고 싶다는 조금 웃긴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소공녀>는 현재의 나에게 있어 가장 인생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자주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만큼 버겁다고 느껴질 때도 많은 현실 속에서 낭만이 필요할 때, 좋은 영화란 무엇이고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이 영화를 찾게 된다.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미소를 보고 있으면, 때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에서 내가 살면서 결코 놓지 못할 것들은 무엇인지 손가락으로 세어보게 되고, 그것만 변함없이 나의 곁에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부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은 타 플랫폼에 기재했던 글의 재업로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