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리뷰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지구에서 한아뿐> 中
친환경 SF 로맨스
<지구에서 한아뿐>을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때, '친환경 SF 로맨스'만큼 적당한 표현은 어디에도 없을 거다. 셋 중 하나도 빼놓을 수가 없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내가 본 가장 사랑스러운 SF 소설이며, 동시에 가장 무해하고 친환경적인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정세랑 작가의 문장으로 그려지는 사랑들은 늘 세상에 무해하고 사람에게 친절하여 도리어 내 마음엔 유해한 맛이 있지만, 정세랑 작가님의 모든 책을 읽어본 독자로서 작가님의 작품 중 사랑의 달달함으로는 이 소설이 단연 최고일 것이라 말해본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주인공 한아는 디자이너이자, '환생 - 지구를 사랑하는 옷 가게'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옷 수선 가게를 운영 중인 사장이다. '환생'은 고객들의 의뢰에 따라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옛날 옷이나 유족들의 옷을 수선하거나 재활용하여 새로운 옷으로 만들어 주는 가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미 이 소설에 마음을 뺏겼다. '환생'이라는 수선 가게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아가 환경과 인간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지구에서 한아뿐> 中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는 말이겠지만, <지구에서 한아뿐>에는 두 명의 경민이 등장한다. 우주의 끝까지 여행하고 싶어했던 경민과, 한아를 위해 우주를 여행한 경민. 두 경민 모두 한아를 사랑했지만, 한아보다 여행을 사랑했던 경민은 결국 우주의 끝을 향해 떠났고, 경민의 자리는 한아와 함께 있기 위해 2만 광년을 날아온 어떤 생명체가 차지하게 되었다.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 경민인 것처럼 하고 있지만, 한아에게 불리우는 이름도 여전히 경민이지만, 분명히 다른 생명체인 어떤 존재.
책을 읽으며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한아를 사랑하여, 한아의 옆에 있기 위해 경민과 계약을 하고 2만 광년을 날아와 한아의 곁을 얻고, 결국 한아와 사랑하게 된 경민의 사랑을 하나도 폭력적이지 않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는 과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야 순정이지만, 순식간에 남자친구를 바꿔치기 당한 한아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가와 경민은 한아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다. 한아가 경민이 이전의 경민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동시에 변한 경민을 내심 더 반기게 됐을 때쯤, 경민은 한아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히고 모든 것의 자초지종을 고백한다.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지구에서 한아뿐> 中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한아에게 경민이 내어놓은 자신의 마음이다. 이토록 넓은 우주에서도 직접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 이렇게 마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고백은 한아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까지도 단번에 움직였다. 오로지 직접 고백하기 위해 2만 광년을 날아오고도 이해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경민의 우주적 사랑이 지구인에게 통하지 않을 리 없었다.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지구에서 한아뿐> 中
소설의 초반부가 한아를 향한 경민의 사랑고백서라면,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경민을 향한 한아의 사랑을 담뿍 느낄 수 있다. 한아는 경민이 이전의 경민이 아닌 것을 알고도 그를 계속 '경민'이라 부르지만, 더이상 그 이름을 부를 때 이름의 전 주인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한아는 이제 경민의 이름을 아주 특별한 사랑을 이르는 보통명사처럼 여긴다. 한아는 껍데기 속 경민이란 존재를 사랑하게 된 거다.
한아의 감정들이 적힌 문장들을 읽다 보면, 한아가 경민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나 기다림에 익숙하다고 생각해온 한아였지만, 고작 며칠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게 되고, 세상엔 즐거운 기다림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언젠가엔 자신을 두고 우주 여행을 떠난 이전의 경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님을 알고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언제나 더 나은 지구를 만들고 싶어했던 한아가 본인 역시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은 기쁘다.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인 한아와 유리, 좋은 외계인인 경민을 보며 좋은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든 소설이든 SF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SF 소설은 특히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상상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 그렇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거대하고 웅장한 SF 소설을 기대하고 읽는 사람이라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경민이 들려주는 지구 밖의 이야기와, 우주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세랑 작가의 문장들, 무엇보다도 지구에서 하나뿐인 사랑, 거대한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평범하고 무해한 이의 이다지 사랑스러운 이야기만으로 이미 이 소설은 다채롭고 풍부하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그런 책이다. 아름다운 사랑 고백들이 책 전체에 가득하다. 서로에게 우주적 사랑을 말하는 한아와 경민이, 경민이도 채울 수 없는 한아와 유리의 사랑, 지구와 우주,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사랑하는 한아. 자신의 아티스트를 사랑하고 확신하는 주영과,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의 인연을 기억하며 시간이 흐른 후에도 한아와 경민의 안부를 묻는 정규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세랑 작가의 언어로 쓰인 한없이 달달하고 애틋한 SF 로맨스가 궁금한 이들에게 주저없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