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결혼할 때 반드시 '집안'을 보세요

by 이손끝



겨울이 되면 엄마가 지나치지 못하는 게 있다.

붕어빵, 군고구마 아니고 바로 빨간색 구세군의 자선냄비다.

그녀는 몇 년 간 동네에서 노숙하는 할머니에게 햄버거며 샌드위치며 뭘 자꾸 사다 준다.

아이티의 어린 소년, 리오넬이었던가. 그 친구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원하기도 했고,

종종 날아오는 우편물을 보면 지금도 후원하는 곳이 여러 곳인 듯하다.

집에서 막내였던 엄마는 외할머니를 10년이나 병간호했는데,

아무리 자식이래도 치매 환자를 '집'에서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무엇이다.

엄마는 밥 굶는 사람 있으면 지나치지 못하고 집에 들여 밥상을 차려줬다는 외할머니를 닮은 게 틀림없다.


우리 집 가풍은 한 마디로 '연민'인 셈이다.


어떨 때 우리 집 형편에 남에게 다 퍼다 주는 것 같은

엄마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충실히 그 피를 물려받은 것도 같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직접적으로 나서서 하지는 않지만,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는 남편을 만났으니....


남편을 만나고 내가 제일 마음이 갔던 것은,

그의 마음씨였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형편을 못내 아쉬워하고

손 하나라도 보태려는

그 마음에 대책 없이 반했던 것 같다.

요즘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 또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랄까 전통이랄까.

가난한 집의 다섯째 중 맏이로 태어나 고생고생하면서도

일가친척 친구 알뜰살뜰 챙기시는 시어머니를 닮은 게 분명하다.






최근 써야 하는 글은 안 쓰고, 50페이지 가까운 책 작업을 마쳤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공짜로 해주는 작업이었다.

보수도 안 받고 일하게 한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남편이 진행한 어떤 토론회 책자를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었는데,

인쇄비로 책정되어 있는 금액에 디자인 비용은 빠져있었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남편이 한다면 몇 날며칠은 걸릴 게 분명해서

마지못해 내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토론회를 주최하면서 남편은 돈을 받았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수익이 전혀 나지 않는 일을 두 사람이 며칠 동안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돈 안 되는 일 많이도 하네 요즘!!" 같은 말들을 내뱉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손을 보태고야 만다.


최악의 경제 상황을 반영하듯 남편의 상담소는 조용하기만 한데,

남편은 꼬리에 불붙은 듯 요즘 더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집밖으로 나오기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위해,

차별에 지친 이들을 위해

토론회나 간담회, 무료 웨비나 등을 열고 상담을 이어간다.


연민, 동정, 부부싸움, 이혼, 결혼, 일상에세이, 공감에세이.JPG
안동, 산불, 재난, 홍수, 가뭄, 지진, 구호, 심리상담사, 상담심리사.JPG
지난 3월 안동에서 대형산불이 났을 때 남편은 구호물품을 싣고 직접 다녀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나섰는데, 진화가 아직 덜 된 상태라 그가 걱정돼서 같이 갔던 거다.




정말이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남편이 하는 일들은

전부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일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게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가 작디작은 마음 그릇의 크기를 탓하게 되는데,

분명 좋은 일인데 우리에게는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남편이 미워질 때가 있다.



시어머니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여간해서 남편의 흉을 보거나 하지 않는데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요즘 OO 이는 뭐 하니?"


"네 어머니, 요즘 일이 많이 없어서요. 그런데 오빠는 세상 사람이 다 불쌍한가 봐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돈 안 되는 일을 참 많이 해요."


"돌아다니는 건 아빠 닮았고, 그런 거 못 보는 건 뭐, 나 닮았겠지..."


연민은 유전처럼 흐른다.


자정이 되자 안방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이

신데렐라가 된 것 마냥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할 일이 아주 많아. 남들처럼 잘 거 다 자면서는 세상을 위한다고 할 수 없지."


"아무도 여보에게 세상을 위해 일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맞아. 아무도 없지. 허허.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 많더라고."


속옷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밤늦도록

뭔가를 하는 남편을 보며,


슈퍼맨 같다고 생각하는 나.

조금은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끼리끼리.

유유상종.


이러니 결혼할 때는 꼭 집안을 봐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고려할 것이 한 두개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정작 결혼해 살면서 결국 남는 것은

'태도'나 '마음씨' 같은 보이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일상을 좌지우지 한다.


우리 집에서 '연민'이라는 단어는 유전처럼 흘러갈 것이다.

내 아이에게도.


어제 아이가 넘어지며 두 무릎이 다 까져 생채기가 났다.

어린이집 등원하기 전에 상처에 밴드를 붙여줬더니,


"엄마 밴드 더 챙겨 가도 돼?"


"왜? 필요할 거 같아?"


"응, 친구들이 다치면 내가 붙여주게."


이쯤 되면 별 수가 있나.

다른 사람도 잘 살고 나도 잘 먹고사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일단 절약 차원에서 집안 곳곳에 켜진 불부터 잘 꺼야겠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