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역사

(라 쓰고 갈증의 역사라 읽는다)

by 여전히 나인

나는 동시에 두 명 이상을 만난 적이 많다.

한 남자만 만나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허기지고 갈증이 났다.





스무 살엔, 고등학생 때부터 만난 한 살 연하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김연수, 외모가 출중한 애였다.

나만 바라보는 착한 구석도 있었다.


서울 소재의 대학에 붙고, 선배들과 처음 인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사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공붓벌레'들이 모인 대학이기에 공부만 잘하는 찐따들이 모여있겠지,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촌구석에서 막 상경한 내 눈엔 선배들, 동기들 모두 나보다 멋져 보였다.


우리는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차례가 오기 전 동기 남자애 하나가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 애는 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한 여선배가 물었다.


"그 반지는 뭐야? 여자친구?"

"재수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선배들은 조만간 헤어지겠다며 킬킬댔다.


나는 연수와 맞춘 커플링을 끼고 있었다.


'선배들이 내 손을 보면 커플링의 정체에 대해 질문할 테지. 그냥 빼자.'


커플링을 뺀 채 흘러간 내 자기소개 시간은 다행히도, 어쩌면 아쉽게도 별 일 없이 지나갔다.


이때가 시작이었다.

내 마음의 첫 동요. 첫 갈증.

바람이었다.


연수 한 사람 이외의 누군가와 사귀고 싶다고 생각한 첫 순간이었다.





태하 오빠를 처음 만난 건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덕분이었다.


한 게시물에서 우리는 우연히 연결되었고, 쪽지를 나누다, 학교에서 가까운 어느 술집에서 만났다.


태하 오빠는 얼굴은 못생겼지만 키가 컸다.

또, 어딘가 모르게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 보였다.

나는 이 점이 좋았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면서 온도가 높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태하 오빠는 주식과 등산, 야구에 빠져 있었다.

촌구석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나는 주식과 등산, 야구 이야기가 모두 신기했다.

내가 반응이 좋자 오빠는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댔다.


헤어질 무렵, 나는 내심 기대를 했다.

2차를 가자고 하려나, 아님 밤새 같이 있자고 하려나.


하지만 오빠는 담백한 이별을 택했다.


기숙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빠에게 문자를 했다.


- 나 왜 이렇게 일찍 보내요? 나 별로예요?


깜찍한 나의 문자는 오빠를 즐겁게 만들었고, 그 뒤 우리는 커플이 되었다.





태하 오빠에게는 오랜 친구가 셋 있었는데 모두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셋 중 둘은 여자, 하나는 남자였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조금 양보한다 쳐도, 친구는 가능할지언정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태하 오빠는 달랐다.

오빠는 세 친구 중에서도 '채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사람친구를 가장 친한 친구로 두고 있었다.


채연 언니 때문에 우리는 자주 다퉜다.


오빠는 끝까지 친구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여전히 나는 둘 사이에 분명 친구 이상의 감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텔에서 함께 밤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태하 오빠는 날 만나기 전 술 약속이 있었고, 이미 취한 상태에서 날 만나러 왔다.

오빠는 일찍 잠에 들었다.

나는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오빠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채연"이었다.


당시 우리는 오래 만나긴 했지만 서로의 핸드폰까지 속속들이 보는 사이는 아니었다.

비밀번호는 서로 공유해서 알고 있지만, '설마 몰래 핸드폰을 열어 보겠어? 사생활은 지켜주자.',

뭐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은 밤 "채연"의 문자를 무시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핸드폰을 켰다.


...


몇 초도 볼 수 없었다.

문자 창을 열자마자 둘의 애정표현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울면서 태하 오빠를 때렸다.

자고 있던 오빠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을 때리지 못하도록 나를 꽉 안았다.


내가 진정되자 오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 이 사람, 네가 아는 '채연'이 아니야. 며칠 전에 소개팅 어플에서 알게 된 여잔데, 너한테 들키기 싫어서 이름 바꿔 저장했어. 미안해."


태하 오빠는 나 한 명의 사람에게 갈증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소개팅 어플은 그에게 손쉽게 갈증을 해소할 음료 자판기였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뭐가 나은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본 채연 언니가 진짜 "채연"인 게 나았을지, 아님 새로운 "채연"이 채연 언니가 아닌 게 다행인 건지.


하나 확실한 건, 나 또한 갈증을 해소할 돌파구가 하나 생겼다는 점이었다.





소개팅 어플을 깔아보았다.

그곳은 여자에게 천국 같은 곳이었다.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사람이 아무도 없는 쇼핑몰 피팅룸 같았다.

맘에 드는 옷들을 쇼핑백에 가득 담아 편하게 입고, 버리고, 선택하고.

이 세계에서는 여럿을 쉽게 취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쉽게 잃는 것도,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가장 중요하고 슬픈 사실은, 이 세계에서 입은 옷은 아무리 맘에 들더라도 진짜 내 옷, 내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악순환이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를 찾고, 쉽게 취한 누군가에게 더 커진 갈증을 느끼고,

그래서 또 다른 누군가를 찾고, ..., 또 갈증이 났다.


그렇게 나는 태하 오빠를 두고 동시에 여럿을 만났다.

바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바람 중첩 상태의 지속이었다.





태하 오빠와 나는 지루한 연애를 오래 했다.

연애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애매한 관계였다.


그와 헤어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갈증이 났다.

누구와 함께여도, 누구를 만나도 똑같았다.


이제야 안다.

갈증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꺼냅니다.

오래된 기억과 감정들을 지나, 여전히 나인 나로 살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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