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당했다. 트레이더 조 2탄

미국 동네 마트가 보여준, 무서운 PB의 정석

by 적응형이방인

"또 당했다."


2.99불, 5.99불. 가벼운 가격에 홀려 정신없이 담다 보면 어느새 100불이 훌쩍 넘어있는 트레이더 조(Trader Joe's) 영수증. 길게 늘어진 종이를 받아 들고 멍하니 서서 하는 생각이다.


상품을 기획하고 마케팅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9년 가까이 해온 MD조차 매번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드는 힘. 도대체 이 '상품'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1. 잘 팔리는 찐 템만 모아놓은 알짜배기 마트

트레이더 조의 매장은 크지 않다. 한국 기준으로 치면 대형마트는커녕, 동네 중형 마트 수준이다.


매장에서 판매하는 상품 가짓수도 약 4,000개 안팎이다. 타겟(Target)이나 월마트(Walmart) 같은 대형 유통사가 수만 개에서 많게는 10만 개가 넘는 상품을 취급하는 것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은 숫자다.


이 '적음'은 결핍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가 아니라, "네가 좋아할 것만 남겨뒀어"라는 MD의 자신감에 가깝다.


이렇게 작은 매장들이 모여 만드는 숫자는 결코 작지 않다.

트레이더 조는 현재 미국 전역에 약 60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연 매출은 업계 추정치 기준 약 133억 달러에 달한다. 한화로 약 18조 원이니 어마어마한 매출 규모이다.


더 놀라운 것은 '공간의 효율'이다.

트레이더 조 매장 하나의 크기는 한국의 동네 중형마트 수준인 300~400평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매출은 점포당 연간 300억 원에 육박한다. 미국 유통업계에서 단위 면적당 매출 1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다.


한정된 공간에 오직 잘 팔리는 것들로만 꽉 채운 알짜배기 마트, 바로 트레이더 조(Trader Joe's)다.




2. 동네 마트가 보여 준 PB 상품의 정석

사실 트레이더 조의 핵심 경쟁력은 '상품' 그 자체다. 판매 상품의 80% 이상이 PB(자체상표상품)다. 한국에서 PB라 하면 보통 '가성비 좋은 저렴한 대체재'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트레이더 조의 PB는 결이 다르다.


트레이더 조 PB는 다른 곳 어디에서도 살 수 없다. 대체로 맛있고, 신박하고, 트렌디하다.

즉, ‘싸서 고르는 상품’이 아니라 ‘일부러 찾게 되는 상품’인 것이다.


모든 요리에 뿌리기만 해도 감칠맛을 폭발시키는 시즈닝, 오븐에 넣기만 하면 레스토랑 급 요리가 완성되는 냉동식품, 시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스낵류, 10달러대라고 믿기 힘든 가성비 와인, 그리고 유독 저렴하고 싱싱한 꽃까지.


외식 물가가 살인적인 미국. 특히 고환율까지 체감해야 하는 한국인에게 집밥을 이토록 쉽고 근사하게 해결해 주는 존재는 드물다.

그래서 ‘믿고 먹는 트조’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트레이더 조에서 고른 음식의 실패 확률은 매우 낮다. 못해도 중간은 간다.


트레이더 조의 한식 상품들, 품절 대란이 있었던 김밥을 필두로 떡볶이, 호떡, 만두, 잡채 등 다양한 K-푸드가 판매 중이다.


가격 또한 착하다. 트레이더 조 PB는 일반 브랜드(NB) 제품에 비해 20~30% 정도 저렴하다.


그 비결은 과감한 비용 절감에 있다. 자체 공장을 짓는 대신, 이미 검증된 제조사들과 협업해 상품을 ‘트조 기준’으로 다시 설계한다. 여기에 중간 유통 마진을 걷어내고, TV 광고 같은 전통적인 마케팅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아낀 비용을 오로지 '상품 가격'과 '품질'에 쏟는다. 그래서 트레이더 조의 PB는 '단순히 싼 상품'이 아니라, '합리적이라 계속 사게 되는 상품'이 된다.


하지만 단순히 싸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엔 더 치밀한 '프라이싱 전략'이 숨어 있다.

트레이더 조의 상품들은 대부분 용량이 작다. 이는 절대 가격을 부담 없는 수준으로 맞추려는 의도된 설계다.


용량을 줄여 가격표를 가볍게 만든 덕분에, 고객은 생소한 신상품 앞에서도 "맛없으면 말지 뭐"라며 쉽게 지갑을 연다.


물론 2.99불, 4.99불이라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정신없이 카트에 담다 보면 계산대에서 100불, 150불이 찍히는 건 순식간이니까.




3. 트레이더 조는 갈 때마다 설렌다.

트레이더 조에 장을 보러 가는 일은 항상 설렌다. 꾸준한 스테디셀러 사이사이에, 오늘은 있지만 다음 주엔 없을 수도 있는 신상품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또 뭐가 나왔을까?', '혹시 시즌 한정 상품을 놓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괜히 매대를 한 바퀴 더 돌게 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은 재미와 신박함을 갖춘 신상품들. 이것이 고객을 매장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트레이더 조는 '시즌'에도 진심이다. 가을 펌킨 시즌이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매장 공기 자체가 달라진다. 단순히 홍보물 몇 개 붙이고 시즌 상품 일부를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다.


주요 시즌엔 매장 상품의 20~25%를 시즌 상품으로 교체한다고 하니, 매장을 통째로 바꿨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때만 먹을 수 있는 한정판 쿠키나 음료를 위해 기꺼이 1년을 기다린다.


마트가 단순한 판매처를 넘어 '계절의 기억'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작년 가을 시즌 트레이더 조 매장 모습. 시즌이 시작되면 단 하루만에 완전히 새로운 매장으로 변신한다.




4. '재고' 대신 '품절'을 택한 용기

트레이더 조는 유독 품절이 잦다. 인기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물량을 과하게 가져가지 않는 전략 때문이다. 보수적으로 발주하고, 차라리 품절을 택한다.


한국 유통사 MD로 일하며 PB상품을 론칭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출시한 신상품이 예상보다 잘 팔려 동이 나면, "왜 물량 예측을 제대로 못 했냐"며 질책받기 일쑤였다. 소비자의 마음이 좌우하는 시장에서 정확한 수요 예측은 사실 신의 영역임에도, MD는 늘 재고와 품절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씨름해야 했다.


하지만 트레이더 조는 재고를 쌓아두는 대신, 고객의 기억에 남는 상품을 남기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구조는 MD에게 실패에 대한 부담 없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고객에게는 “지금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강력한 구매 동기를 부여한다.


연말 시즌에만 판매하는 베이킨 가리비 말이, 마지막 2개가 남아있어 얼른 하나를 집어왔었다.




한국에서 PB 브랜드를 기획하고 론칭하는 업무를 하고, 수많은 PB 상품을 개발해봤기에 나름 PB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트레이더 조의 '찐 팬'이 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고객이 기꺼이 찾아오게 만드는 진짜 PB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트레이더 조는 이를 현실에서 증명해 보이는 PB 리테일러의 교과서 같은 곳이다.




다음 글은 트조 시리즈 마지막편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트레이더 조 제품을 찍어 올리는 이유와 그 팬덤이 만드는 놀라운 마케팅 효과에 대해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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