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미국 식탁의 진실
소비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은 소비자의 선택지가 무궁무진한 만큼,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 역시 온전히 소비자 개인의 몫이라는 점이다.
미국에도 FDA(식품의약국)나 USDA(농무부) 같은 강력한 기관이 존재하지만, 규제 방식은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이 촘촘한 그물망을 미리 치는 '사전 규제' 중심이라면, 미국은 기업의 자율을 최대한 존중하되 문제가 생기면 사후에 책임을 묻는 '사후 책임' 중심에 가깝다.
한국 유통사 MD로 일했던 나는 이런 미국의 방식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유는 특정 성분의 안전성 논란이 터진 이후에도 문제가 된 제품이 버젓이 매대를 지키고 있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느슨한 사전 규제 환경은 소비자에게 끊임없는 '자기 방어'를 요구한다.
대표적인 것이 ‘GRAS(Generally Recognized As Safe)’ 제도다. 기업이 특정 성분의 안전성을 자체적으로 판단하면, 별도의 FDA 사전 승인 없이도 유통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다.
설령 과학적으로 유해 가능성이 제기되더라도, 그것이 법적 규제로 확정되어 매대에서 사라지기까지는 긴 과정과 시차가 존재한다.
결국 국가가 “이건 절대 안 돼”라고 칼을 뽑기 전까지, 그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을지 말지는 오롯이 소비자의 판단에 맡겨진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2021년 미 하원 보고서를 통해 폭로된 이른바 '이유식 중금속 스캔들'이다.
거버(Gerber)나 비치너트(Beech-Nut) 같은 100년 전통의 국민 브랜드 제품에서 납, 카드뮴, 비소 등 중금속이 검출됐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부모들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제품은 즉시 시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검출’과 ‘불법’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확한 연방 기준치가 없거나 기준을 미세하게 넘지 않았다면 판매 자체는 여전히 합법이다.
물론 이후 일부 원재료가 변경되고 FDA의 새로운 권고안이 마련되고는 있지만, 한국 식약처 기준이나 유통사 내부 기준이었다면 판매는 물론 진열 자체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촘촘한 사전 규제와 유통사의 이중 검열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한국 소비자는 비교적 안전한 환경 속에 있다.
한국 대기업 제조사와 유통사는 제품 안전성에 매우 민감하다. 소비자 신뢰가 무너졌을 때 치러야 할 막대한 비용이 기업의 존폐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과거 내가 담당했던 주방용품 중 유아용 식기는 특히 안전성에 예민한 품목이었다. 만약 아이들이 쓰는 그릇에서 유해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작은 의혹만 제기되어도, 한국 유통사는 즉시 움직인다.
확정된 ‘결과‘가 아닌 ‘가능성’만으로도 전국 매장에는 즉시 철수 지시가 내려진다. 동시에 전산상 판매 금지 조치가 완료되어 계산대에서 바코드 자체가 찍히지 않게 되기까지,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스템이 소비자를 대신해 선제적으로 위험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미국의 식탁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요소를 더 봐야 한다. 바로 경제 수준에 따른 식품 접근성의 격차다. 미국에서는 같은 도시 안에서도 소득에 따라 장볼 수 있는 마트와 선택 가능한 식품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하기 어려운 이른바 푸드 데저트(food desert) 지역에서는 값싸고 보관이 쉬운 초가공식품이 식탁의 중심이 되기 쉽다.
반면 소득이 높은 지역에서는 유기농과 저가공 식품을 구할 수 있는 마트가 항상 가까이에 있다.
결국 미국에서 건강한 식탁은 개인의 의지뿐 아니라 소득과 거주 환경이 결정하는 선택지가 된다.
미국 식품 안전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불안은 역설적으로 유기농 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웠다. 그리고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안전한 선택인 유기농 식품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 내가 체감하는 미국 유기농 시장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가짓수가 방대하고 그 폭도 깊다.
2025년 기준, 미국 유기농 식품 시장 규모는 연간 약 750억 달러(한화 약 100조 원)를 넘어서며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식품이 연 2~3% 성장할 때 유기농 식품은 연평균 5~10%대로 성장할 정도로 성장 속도도 빠르다.
한국에서 유기농이 더 건강한 삶을 위한 '취향의 선택지'라면, 미국에서는 가장 확실한 '리스크 관리 전략'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유기농 식품을 메인으로 취급하는 프리미엄 마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단순히 유기농 식료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소비자 대신 제품의 안전성을 한번 더 검증해주는 필터 역할에 가깝다.
230여 가지 유해 의심 성분이 포함된 상품은 아예 입점을 금지해 버린 홀푸드(Whole Foods Market), 천연 원료 중심의 상품에 집중하는 스프라우츠(Sprouts), 그리고 초고가 유기농만 취급하는 에러헌(Erewhon)까지.
소비자는 식재료를 구매하며 “이 마트가 내 가족을 위해 나쁜 성분을 대신 걸러주었을 것”이라는 안심의 가치를 함께 결제한다.
그 중심에는 미국 유기농 마트의 제왕,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이 있다.
홀푸드는 비싸지만 그만한 값을 한다. 그곳의 제품은 단순히 비싼 것이 아니라 신뢰와 안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홀푸드는 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 까다로운 필터를 유지하고 있으며, 어떻게 소비자에게 '신뢰'라는 무형의 가치를 팔고 있는가.
다음 편에서는 미국 넘버원 유기농 마트 홀푸드의 이면을 함께 들여다본다.
미국에서 생소한 제품의 성분표를 보면서 제품 안전성을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래의 앱을 활용하면 비교적 정확하고 쉽게 제품의 안전성을 확인할 수 있다.
1. Yuka(유카)
제품 바코드를 스캔하면 100점 만점 기준으로 점수를 보여주고, 성분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더 나은 대체 상품을 추천해준다. 전 세계 수천만 명이 사용하는 식품·생활용품 성분 분석 앱이다.
2. EWG’s Healthy Living
비영리 환경단체 EWG(Environmental Working Group)가 만든 대표적인 성분 분석 앱. 호르몬 교란 물질, 발암 가능성 등 화학 성분의 위험도를 데이터 기반으로 평가한다.
3. Bobby Approved
성분 중심 소비를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앱. 칼로리보다 원재료의 ‘질’을 중요하게 보며, 종자유(Seed oil)나 인공 향료 등이 포함되면 경고를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