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분투 워킹맘에서 미국 주재원 와이프가 되다.
‘안정’이란 이런 것일까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는 어느덧 자라 육아의 파도는 한결 잦아들었고, 긴 휴직 끝에 복직한 회사에서도 이제야 겨우 내 자리를 찾아가던 참이었다.
조부모님과 등하원 도우미 선생님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워킹맘 라이프였지만, 사랑하는 내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비어버린 커리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며 보냈다.
팀장님과의 면담에서 내게 앞으로 더 큰 범위의 업무를 맡기고 싶다는 제안을 들었던 그날,
거짓말처럼 남편에게서 짧은 카톡 하나가 날아왔다.
우리 미국에 가야 할 수도 있어.
누군가에게 '미국 주재원 가족'이라는 말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막 인생의 궤도에 다시 올라탄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남편이었기에 언젠가 한 번은 나갈 줄 알고 있었지만, 하필 이 시점일 줄은 몰랐다.
그 후 몇 달간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폭풍이 몰아쳤다. "가족은 떨어져 살 수 없다"는 나의 오랜 신념과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결국, 나는 이제야 겨우 되찾은 내 길을 접고 남편의 길을 함께 걷기로 결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행을 결정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주재원 와이프가 된다던데!
일 안 하고 미국에서 살다니 정말 부럽다.
미국 주재원?
이제 꼼짝없이 독박 육아에 라이딩까지,
원정 식모살이 하러 가는 거네.
부러움과 걱정 사이, 온도 차가 극심한 두 시선 중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미국 생활 1년이 지난 지금, 나의 삶은 그 중간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회사의 지원 덕분에 물가가 높은 미국살이 중에도 경제적으로 팍팍하지 않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운동을 하거나 한국에선 꿈도 못 꿨던 평화로운 '브런치 타임'을 즐기고, 때로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미국 곳곳을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평화 뒤에는 한국 워킹맘 시절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다양한 '1인 다역'의 노동이 숨어 있다.
높은 물가와 외식의 한계 탓에 매일 삼시 세끼를 차려내는 요리사가 되었고, 하루 네 번의 라이딩은 기본인 전담 운전기사가 되었다.
학교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가르치는 교사, 남편과 아이의 머리를 깎는 이발사, 뒷마당 잡초와 씨름하는 정원사 역할까지 수행하다 보면 24시간이 모자라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한 식모'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된 노동보다 나를 더 괴롭히는 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가족을 서포트하는 일에 하루를 다 쏟고 나면, 매일 분주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공허함이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한국에서는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 직업과 경력이 곧 명함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그저 '남편 따라온 한국인 주부'일 뿐이다. 그 이름 뒤에 덧붙일 나만의 문장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기분이다.
가끔 누군가 한국에서의 커리어를 물어주면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대화가 끝나면 다시 공허함이 밀려온다.
직업을 내려놓은 순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늘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른다.
여기에 '주재원 와이프'라는 이름표가 주는 미묘한 소외감도 더해진다.
척박한 땅에 스스로 뿌리를 내린 이민자들에게 주재원은 '잠시 머물다 떠날 이방인' 혹은 '회사의 지원으로 수월하게 사는 구경꾼'으로 비치곤 한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민 가정과의 저녁 자리에 참석했었다.
그 날 내가 저녁 자리에서 들었던 한마디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사실 주재원 좋아하지 않아
순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당황했다.
어쩌면 이 말은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 생태계를 모르는 내게 알려주려는 친절한 조언이었기에 마음이 더 복잡했다.
주재원 가정, 주재원 와이프, 주재원 아이들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버린 우리는 이곳에서 진정 누구로 살아가게 될까.
그리고 앞으로 5년, 우리에게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전히 나는 그 정답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동안 발행했던 글들을 한데 모아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엄마로>를 엮게 되었습니다.
책의 구성을 위해 일부 글을 재발행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리며,
다시 읽어도 가치 있는 기록이 되도록 정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