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개법

사법정권에 부쳐

법이 있다고 믿었던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은 욕망이고, 오직 욕망 뿐이다. 사법(정의)은 욕망이지 법이 아니다.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 &가타리          


 “대한민국 법, 개법이다.” 어린 시절, 늘 먹고 사는 일에 쪼들리느라 배운 것 없었던 어머니가 종종 했던 말이다. 요즘 따라 자꾸만 어머니의 그 말이 떠오른다. 검찰총찰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일까? 바야흐로, 사법 정권의 시대다. 정부도 관료도 모두 법을 외쳐댄다. 정부는 이웃나라가 핵폐기물을 바다에 방류하는 것이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한다. 국토교통부장관은 대통령 처가와 관계되어 있다는 의혹 있는 지역으로 고속도로 계획이 전면적으로 바뀐 것은 법대로 진행된 일이라고 한다.


 비단 두 가지 일 뿐이겠는가? 이번 정권은 크고 작은 마찰과 갈등에 모두 법을 내세워 심판한다. 이 모든 일에 소시민들은 입을 닫게 될 수밖에 없다. 법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법대로 한다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것이 이번 정권의 믿음이고 더 나아가 모든 (여‧야 구분할 것 없는) 정치인들의 믿음이고, 동시에 상식적인 시민들의 믿음이다. 그런데 의아하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한다는 데도, 우리는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때로 울분이 솟구친다.


 왜 그럴까? 법을 지킨다고 말만 할 뿐,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예외적인 몇 몇 사안을 제외한다면, 이번 정권은 준법적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검찰총찰이 대통령이고, 그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했던 검찰이 법무부 장관이고, 정부조직 곳곳에 검찰출신이 포진해 있는 것이 이번 정권 아닌가?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이들이 법을 지키기 않을 리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답답함과 울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법 자체를 다시 보아야 한다. 사법은 정의인가? 우리 시대 너머에 있는 철학자, 들뢰즈는 분명히 말한다. "법이 있다고 믿는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은 욕망" 뿐이라고. "사법(정의)는 욕망일 뿐 법이 아니"라고. 정말 그렇지 않은가? 법은 애초에 그 법을 제정한 이들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욕망의 결정체이고, 그 법의 수정과 보완은 그것을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이들의 욕망의 첨가물이다. 들뢰즈의 일갈은 법의 변천사로 확인가능하다.


 우리의 법은 보수적인 정권일 때 '있는 자'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쪽으로 수정‧보완되었고, 반대로 진보 정권일 때 '없는 자'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쪽으로 수정‧보완되었다. 이는 법이 바로 욕망이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이들의 욕망은 있는 자들의 욕망을 대변하고자하는 욕망이고, 진보적인 이들의 욕망은 없는 자들의 욕망을 대변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어느 경우이든, 사법을 외치는 이들은 욕망을 외치는 이들이다.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려는 이들이다.


 “대한민국 법 개법”이라는 어머니의 말이 자주 떠오르는 이유를 알겠다. 어머니는 법에서 정의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난무하는 개들의 욕망을 보는 시대를 사셨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어머니의 시대로 퇴행해 있다. 이것이 요즘 들어 자주 어머니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였다. 사법 자체가 이미 욕망이고, 우리 시대의 욕망은 ‘인간’다운 사회를 향한 욕망이 아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개’같은 욕망일 뿐이다. 지금은 법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사회에 대한 최소한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다. 


 많이 배울 필요 없다. 염치를 알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만 알면 된다. 



작가의 이전글 '몸'을 써야 할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