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 해석학>을 시작하며
"철학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들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인생의 선택이다." 미셸 푸코
1.
나의 목표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적‧제도적) 풍경의 일부가 실제로는 어떤 매우 정확한 역사적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분석은 인간 실존에 보편적 필연이 있다는 관념에 대립합니다. 나의 분석은 제도의 자의성을 보여주고, 또 우리가 여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은 무엇이며. 아직도 얼마만큼의 변화가 가능한가를 보이고자 합니다 『자기의 테크놀러지』 미셸 푸코
젊은 푸코는 우리들이 보편적 혹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적‧제도적 풍경의 일부가 실제로는 역사적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는 쉽게 말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동성애는 나쁜 거야!” “감옥은 나쁜 놈들이 가는 곳이야” “정신병자는 당연히 격리해야 돼!”)들이 실은 특정한 권력과 체제 추동한 자의적인 결과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푸코는 이런 삶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계보학과 고고학적 방식으로 철학적 앎에 접근하려 했던 겁니다.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묻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서, ‘나는 순응적인 존재이고,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며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다’라고 답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금의 나는 어떤 과정(개인적 과정뿐만 아니라 사회‧역사적 과정까지 포함하는) 과정을 통해 순응적인 존재, 동성애자, 정신병자가 되거나 혹은 되지 않았는가?’를 묻습니다.
이런 일련의 푸코 철학의 중심에는 ‘생명권력bio-power’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생명권력’은 무엇일까요? 이는 ‘생명’에 대해 가해지는 권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특정한 외부 권력이 한 인간을 억압한다는 차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한 폭력적 권력(고문‧처형)의 억압은 ‘표면적 복종’을 만들어내지만, ‘생명권력’(감시‧훈육)의 억압은 ‘자발적 복종’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전혀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는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다 출소해서 사회로 나온 흑인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유로운 사회로 나왔지만 관리자(간수)의 허락이 없으면 소변조차 볼 수 없는 육체로 길들여져 버렸습니다. “40년 동안 허락을 받고 오줌을 누러 갔다. 허락을 안 받으면 한 방울도 안 나온다.” 그 흑인의 화장실 독백 장면은 ‘생명권력’이 어떤 것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푸코는 특정한 권력이 우리의 몸 구석구석을 미시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생명권력bio-power’이란 개념을 사용합니다. 생체권력은 ’칼‘ 대신 미소 띤 감시와 훈육으로 한 개인의 육체와 사회 자체를 지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생체권력’이란 특정한 권력이 우리(인간)의 신체에 개입하여 철저히 길들여서 인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권력인 셈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생명권력’에 철저하게 훈육된 상태입니다. 가정, 학교, 군대, 직장 역시 ‘생명권력’의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들은 정도와 종류의 차이만 있을 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육체와 내면을 철저하게 길들입니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혹은 업무가 해결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지요? 심지어 지독히도 하기 싫은 숙제와 업무를 마치 자신이 원해서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이들 역시 얼마나 많던가요?
“영어공부가 좋아!” “일하는 게 좋아!” “낮잠 자는 건 불편해” “섹스는 불결해!” 이런 마음은 모두 자발적 복종입니다. 이 자발적 복종은 ‘생명권력’이 우리 내면을 완전히 지배했기에 발생하는 뒤틀어진 욕망입니다. 권력의 지배는 단지 신체의 통제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젊은 푸코가 규명하려했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었습니다.
푸코는 권력의 문제는 선명한 구도인 ‘지배자-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네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열하는 자아-검열당하는 자아’ 관계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만약 푸코가 없었다면 우리는 권력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지배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끔찍한 복종을 강요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발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의 섬뜩한 웃음. 그것은 푸코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일 겁니다.
2.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얼굴을 갖지 않기 위하여 쓰는 사람이, 물론 나를 포함하여, 존재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기를, 그리고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말하지 말기를, 그런 질문은 우리의 서류를 지배하는 호적계의 도덕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쓸 때, 이 도덕이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기를” 『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
이제 푸코의 문제의식은 자기일탈에 집중됩니다. 이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지금 ‘나’는 ‘생명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훈육된 ‘나’입니다. 그런 ‘나’는 어떤 ‘나’인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실은 내가 원하는 것인 상태의 ‘나’입니다. 그러니 훈육된 ‘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혀 권력의 부속물로서 밖에 존재할 수 없을 테지요. ‘생명권력’이 우리의 내면(감성구조)마저 완전히 지배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기해방에 이를 것인가? 이것이 바로 죽음에 임박한 상황에서 까지 해명하려고 했던 푸코의 일생의 과제였습니다.
푸코의 철학적 목표는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정확히는 권력으로부터 훈육된 ‘나’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로 나아가기. 푸코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런 것들을 묻는 것은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즉, 본적지, 성명, 생년월일 따위를 규정하는 호적상의 도덕을 강요하는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일일 뿐이니까요. 우리는 서류가 아니며, 만약 우리가 서류라면 그것은 권력에 의해 ‘작성된 서류’가 아니라 스스로 ‘작성할 서류’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서류’를 작성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시작부터 사물화 되어버린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의 심층부에 훈육이 가해진다. 그 결과 인간 존재가 여전히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음의 상태나 유년기의 어떤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결함이 있는 교육 및 신앙 체계에 사로잡힌 인생 속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참조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자기실천의 목표는 자기 자신 내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행위다. 『자기와 타자의 통치 : 콜레르 주 프랑스 강의 1982~1983년』
자기배려. 푸코가 죽음에 임박한 말년까지 씨름하던 개념이었습니다. ‘나’는 훈육된 ‘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당연히 그 ‘나’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겁니다. 그 자기일탈의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학대. 자신이 싫을 때 우리는 자신과 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슬픔의 싸움으로는 자기파괴만 있을 뿐, 진정한 자기긍정은 있을 수 없죠. 원숙해진 푸코는 진정한 자기배려의 길에 이르는 길에 대해 탐구합니다. 그것을 ‘자기실천’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자기실천’은 무엇일까요? ‘자기발견’을 통해 ‘자기긍정’에 이르는 실천입니다. 자기긍정이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은 인생의 시작부터 심층부에 가해진 훈육의 결과(정제된‧정적인‧지적인‧신앙적‧이념적 생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자기정당화나 자기합리화일 순 있어도 자기긍정일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길은 자기긍정일까요? 즉 우리가 받은 그 모든 훈육의 결과(지금의 ‘나’)를 증오하는 것 역시 자기긍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슬픔뿐인 자기학대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배려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심층부에 가해진 훈육의 결과로 인해 결코 자신의 인생에서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발견할 때 가능할 겁니다.(자기발견!) 훈육된 ‘나’ 안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자기 자신과 일치(긍정!)시키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가 그리도 염원하던 ‘자기배려’입니다.
이제부터 공부하게 될 ‘푸코’는 이 자기배려에 이르는 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푸코’라는 세계를 기쁜 마음으로 여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여행이 끝났을 무렵, 모두 저마다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해방하며, 자신을 긍정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