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의 뿌리
“그때 걔가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있을 때 잘하지.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를 왜 하냐?”
‘정찬’은 늘 이런저런 후회 속에 산다. 소개팅을 하고 와서 예전 연인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후회한다. 비단 연인만 그럴까? ‘정찬’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려 했던 친구들을 함부로 대해 소중한 인연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정찬’은 늘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때 걔가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것이 ‘정찬’이 늘 슬픔이 가득 찬 불행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후회만큼 우리네 삶을 슬픔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 감정도 없다.
‘정찬’의 문제는 무엇인가? 옛 연인에게 받은 분에 넘치는 애정과 관심을 당연한 혹은 부족한 것이라고 여겼고, 자신이 연인에게 준 턱없이 부족한 애정과 관심을 예외적인 혹은 충분한 것이라고 여겼던 일이다. 이는 모두 소중한 이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정찬’의 후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후회의 뿌리는 하나다.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마음.
아이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을 때, 부모는 후회한다. 왜 그런가? 소중한 아이를 소중히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부모가 허망하게 죽었을 때, 자식은 후회한다. 왜 그런가? 소중한 부모를 소중히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대하지 못할 때 때늦은 후회는 피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보지 못해서 후회하며 살게 되는 것일까? 바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볼 수 없는 이유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가장 상처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가장 소중히 대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장된 자기연민에 휩싸인 이가 어떻게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가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가난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과장하고 확대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그때 기적처럼, 그들을 아껴주려는 소중한 사람(연인‧친구)이 나타났다고 해보자. 피해의식에 휩싸인 그들은 그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을까? 연인이 매달 생활비를 아껴 ‘노트북’을 선물해주었을 때, 그들은 그 ‘노트북’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친구가 빠듯한 생활에도 매번 만날 때마다 ‘밥’을 살 때, 그들은 그 ‘밥’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소중함을 알 길이 없다. 그들은 가난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신만을 보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에게는 ‘노트북’도, ‘밥’도 모두 당연한 혹은 심지어 부족한 것일 뿐이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부족한) 거지.” 동시에 자신이 연인과 친구에게 해준 사소한 것들은 너무 쉽게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여긴다. “가난한 내가 이런 걸 해주는 건 대단한 거지.”
이는 제3자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가장 불쌍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자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이가 어떻게 자신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드물고 귀한 존재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피해의식은 소중한 것들을 소중히 대하기는커녕 함부로 대하게 만든다. 이것이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필연적으로 불행해지는 이유다.
후회와 정신승리
그렇다면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피해의식의 밀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피해의식이 옅은 이들이 있고, 피해의식이 짙은 이들이 있다. 이 밀도의 차이에 따라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파악하는 태도 역시 달라진다. ‘정찬’과 ‘성도’는 모두 피해의식이 있다. 그래서 둘 다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 소중한 것들을 소중히 대하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소중한 것들을 속절없이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정찬’은 소중한 인연을 놓쳤을 때,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때 걔가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성도’는 다르다. ‘성도’는 소중한 인연을 놓쳤을 때 후회가 아니라 정신승리를 한다. “결국 걔도 별 볼 일 없는 애였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바로 피해의식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피해의식이 옅은 이들은 ‘후회’를 하고, 피해의식이 짙은 이들은 ‘정신승리’를 한다. ‘후회’와 ‘정신승리’는 모두 피해의식 때문에 발생한 마음이지만, 이 두 마음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정찬’은 옅은 피해의식으로 ‘후회’하고 있다.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소중한 인연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낸 것에 대해 가슴 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정찬’은 그 후회로 인해 자신의 피해의식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게 될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 고통스러운 후회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이 옅으면 ‘후회’라는 마음을 매개로 그 피해의식이 옅어지는 선순환에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성도’는 다르다. ‘성도’는 짙은 피해의식으로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성도’ 역시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소중한 인연들을 떠나보냈지만 그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떠난 이들은 모두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정신승리를 한다. 이런 정신승리는 ‘성도’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신승리는 자기정당화(‘나는 잘못한 게 없어.’)를 강화하고 동시에 자기연민(‘내가 가장 불쌍해.’)을 강화한다.
‘성도’는 왜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할까?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떠났다고 믿는다. 이런 마음(자기정당화)은 스스로를 더욱 불쌍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게 만든다(자기연민). “결국 세상에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그렇게 강화된 자기연민은 다시 피해의식을 짙어지게 만든다. ‘성도’는 소중한 이들이 떠날 때마다 정신승리를 반복할 뿐,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결코 볼 수 없다. 이처럼 피해의식이 짙으면 ‘정신승리’라는 마음을 통해 그 피해의식이 더 짙어지는 악순환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성도’는 결국 끝없는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정신승리와 후회 너머 섬세함으로
자신의 피해의식의 밀도를 진단해보라.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해 소중한 인연을 떠나보냈는가? 그렇다면 어떤 종류이건 간에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는 방증이다. 소중한 인연이 떠났을 때 ‘후회’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신승리’하고 있는가? 전자라면 옅은 피해의식이 있는 셈이고, 후자라면 짙은 피해의식이 있는 셈이다. 만약 우리 역시 ‘성도’처럼 짙은 피해의식 속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회’하면 된다. 아니 ‘후회’해야 한다. ‘후회’와 ‘정신승리’는 모두 피해의식이 남긴 슬픔이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위상의 슬픔이 아니다. ‘후회’가 ‘정신승리’보다 백번 낫다. ‘정신승리’는 ‘기쁜 슬픔’이라면, 후회는 ‘슬픈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승리’를 하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기에 잠시 기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이내 더 큰 슬픔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정신승리’의 기쁨은 삶의 변화 가능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회’는 다르다. ‘후회’는 분명 잠시의 슬픔을 주지만 곧 기쁨으로 전환된다. ‘후회’는 슬픔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아픔(슬픔)을 직면할 때 삶의 변화 가능성(기쁨)에 가닿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후회’한다면,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마련된다.
‘정신승리’ 너머 ‘후회’로, 그리고 ‘섬세함’으로
피해의식은 고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실존적 선택에 따라 더 짙어지기도 하고 더 옅어지기도 한다. ‘정신승리’를 할 때 피해의식은 점점 더 강화되고, ‘후회’를 할 때 피해의식은 점점 더 약화된다. 피해의식이 옅어지길 바라는가? 아프게 ‘후회’하면 된다. ‘정신승리’의 쾌감을 내려놓고, 고통스러운 ‘후회’를 감내할 때 피해의식은 그만큼 옅어질 가능성을 품는 셈이다. 충분히 ‘후회’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피해의식 그 자체를 넘어설 준비가 되었다.
어떻게 피해의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정신승리’와 ‘후회’ 너머에 ‘섬세함’이 있다. 섬세해지면 피해의식을 넘어설 수 있다. 섬세함이 무엇인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너’를 살펴보는 일이다. 섬세해진다는 건, 누구를 만나더라도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을 때 분에 넘친 것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 턱없이 부족한 것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스레 살피는 마음. 그것이 섬세함이다.
섬세함에 이를 때 알게 된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소중한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섬세해져서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을 때, 피해의식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을 테다. 피해의식은 오직 ‘나’의 상처만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환영이다. 섬세함은 이 환영을 깨뜨린다. 섬세함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너’를 살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상처 너머 ‘너’의 상처를 섬세하게 살필 수 있는 이들에게 피해의식이 있을 리 없다.
피해의식은 이미 결정된 ‘운명’이 아니다. 피해의식의 밀도도, 피해의식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매 순간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피해의식의 밀도는 옅어질 수도 짙어질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피해의식 그 자체를 넘어설 수도 있다. 피해의식은 ‘운명’이 아니라 ‘실존existence’이다. 피해의식은 자신의 결단에 따라 자신 ‘밖으로ex-’ 끊임없이 벗어날 수 있는 ‘존재istence’일 뿐이다. 삶의 매 순간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피해의식 밖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