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군대라는 거대한 폭력


“아, 그때 진짜 저랬는데.”     


 ‘D.P.’라는 드라마를 보며 내뱉은 말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드라마는 군대 내의 고질적이고 악질적인 폭력을 보여준다. 크고 작은 구타, 가족이나 연인 관계 등 내밀한 사생활폭로를 통한 인신공격, 성추행과 성폭력 등등. ‘D.P.’는 인간적 존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격마저 파괴해버릴 정도의 군대 내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이것이 내가 섬뜩함을 느낀 이유였을까? 아니다. 내가 느낀 섬뜩함은 드라마 속 참혹한 가혹 행위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드라마를 보며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공감을 하는 것이 왜 섬뜩한 일이었을까? 그것은 적절한 공감이 아니라, 과도한 공감, 즉 과몰입이었기 때문이다. 군대 내 가혹 행위는 늘 있어 왔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 가혹 행위의 정도는 보통 시대와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대체적으로 선배 세대보다 지금 세대의 가혹 행위가 덜하고, 지금 세대보다 다음 세대의 가혹 행위가 덜하다. 또한 동시대라 하더라도, 공간에 따라 가혹 행위의 정도는 달라진다. 민간과 교류가 많은 부대일수록 가혹 행위가 덜하고, 민간과 교류가 적은 격리된 오지에 있는 부대일수록 가혹 행위가 심한 경향이 있다.    

  

 나는 20년 전에 대표적인 격리 공간인 섬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곳에는 그 시대 그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정도의 가혹 행위들이 존재했다. ‘D.P.’에 등장한 각종 가혹 행위 중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20년 전 섬에서도 할 수 없었던(해서는 안 되는) 가혹 행위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드라마 속 모든 가혹 행위를 보며 “아, 그때 진짜 저랬는데.”라며 과도한 공감을 했다. 

     


피해의식은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D.P.’라는 드라마를 보며 많은 남자들이 크게 공감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들은 대체로 나보다 늦게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었고, 그들 중 격리된 오지에서 군 생활을 했던 이는 드물었다. 아주 불운했던 예외적인 이들을 제외하면, 그들의 공감은 분명 나와 같은 과도한 공감이자 과도한 몰입이었을 테다.      


 왜 많은 남자들이 ‘D.P.’를 보며 과도한 공감과 과도한 몰입에 빠지게 되었을까? 바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군대를 다녀온 이들은 누구나 피해의식이 있다. 군대는 그 자체로 거대한 폭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다녀온 이들 중 쉬이 잊히지 않는 몸과 마음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받은 기억이 피해의식이 된다면, 군대보다 강력하고 거대한 피해의식의 번식처도 없는 셈이다. 그만큼이나 군대에 관한 피해의식은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과공감과 과몰입을 야기한다. 과공감과 과몰입. 이것은 피해의식의 심각한 해악 중 하나다. 비단 군대에 관한 피해의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돈·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그렇다. 돈·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실제든, 매체를 통해서든) 누군가 돈이 없어서, 못생겨서, 학벌이 좋지 못해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 과도하게 공감하고 그로 인해 너무 쉽게 과몰입의 상태에 빠진다. “나도 저랬는데.”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어!” 지금 보고 있는 상처가 실제 자신이 받은 상처보다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과공감해서 과몰입 상태에 빠지곤 한다. 


     


적절한 공감‧몰입 VS 과도한 공감‧몰입     


 피해의식으로 인한 과도한 공감과 과도한 몰입은 심각한 문제다. 혹자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크게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더 나아가 그 공감이 만든 몰입은 건강한 연대 의식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삶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견해다. 피해의식으로 인한 과공감과 과몰입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모두 불행을 야기한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먼저, 과도한 공감‧몰입과 적절한 공감‧몰입이 어떻게 다른지 부터 생각해보자. 과도한 공감‧몰입은 상대와 정서적으로 과도하게 밀착된 상태에서의 공감‧몰입이고, 적절한 공감‧몰입은 상대와 적절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의 공감‧몰입이다. 군대에 관한 피해의식으로 이를 설명해보자. ‘D.P.’에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가래침을 먹으라고 강요하고, 초소에서 자위행위를 강요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대를 다녀온 많은 이들은 이 장면에서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다.

      

 이때 적절한 공감‧몰입은 어떤 것일까? 그 참혹한 폭력은 누군가가 당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직접 당한 폭력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공감하고 몰입하는 것이다. 즉, 군대 내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겪은 일은 아니라고 적절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공감하고 몰입하는 것이 적절한 공감‧몰입이다. 반면 과도한 공감‧몰입은 어떤 것일까? 그 참혹한 폭력을 자신이 직접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감하고 몰입하는 것이다. 즉, 드라마 속 인물이 겪은 폭력과 내가 겪은 폭력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공감하고 몰입하는 것이 과도한 공감‧몰입이다. 

     


피해의식은 어떻게 과공감‧과몰입이 되는가?     


 그렇다면 피해의식은 어떻게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하는 걸까?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이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하게 된다. 피해의식은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바로 그 욕망이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의식→고통의 과장‧확대→과공감‧과몰입→피해의식→…’ 이 반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고 싶은 욕망과 과공감‧과몰입의 상태는 확대 재생산된다. 노골적으로 말해, 자신은 군대에서 고참의 가래침 먹기를 강요받거나, 공공장소에서 자위행위를 강요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동시에 과도한 공감과 과도한 몰입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피해의식 역시 강화된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개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피해의식은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 때문에 발생한다. 자신이 상상한 일들이 기억화될 때 피해의식은 강화된다. 이 ‘상상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고 싶은 욕망은 과공감‧과몰입을 촉발하고, 그것은 다시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게 만든다. 그 악순환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실제로 겪지 않은 상처까지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믿게 되는 ‘상상의 기억’이 만들어진다.

      

 이제 피해의식으로부터 유발된 과공감‧과몰입이 어떻게 한 개인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다. 행복과 불행은 상처받은 기억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으로부터 유발된 과공감과 과몰입은 필연적으로 한 개인을 불행해지는 길로 이끌게 된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없는 상처도 과장하고 확대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러니 피해의식으로 인해 과공감과 과몰입에 자주 빠지는 이들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할 수 없게 만든다

     

 피해의식은 한 개인만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사회적 불행마저 야기한다.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의 또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하며 무심하고 무례하다는 것이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은 쉽게 말한다. “돈 없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일해서 돈 벌면 되지.” 반대로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 역시 쉽게 말한다. “못생긴 게 뭐 대수라고, 돈 많으면 성형 수술하면 되지.” 이처럼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둔감하고 무심하며 무례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턱없이 부족한 공감 능력(둔감‧무심‧무례)은 그들의 과도한 공감 때문에 발생했다. 다시 군대에 관한 피해의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군대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보편적인 고통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장애인들, 여성들, 노동자들이 겪는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장애인, 여성, 노동자들의 상처와 고통에 둔감하거나 무심하거나 무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오직 군대 문제에만 과공감하고 과몰입하느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인 고통과 상처에는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피해의식은 없는 고통을 만들거나 있는 고통을 과장하게 만든다. 그렇게 과공감과 과몰입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촉발된 과공감과 과몰입은 당연히 자신의 피해의식이 향하는 특정한 영역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공감과 과몰입이 건강한 연대 의식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얼마나 순진한 이야기인가? 상황은 정반대다. 피해의식으로부터 시작된 과공감과 과몰입은 건강한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 의식은커녕, 우리 사회에 아귀다툼 같은 갈등과 마찰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일부 군필자들은 왜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과 갈등하고 다투는가? 일부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은 왜 성소수자들과 함께 연대하지 않는가? 일부 노동자들은 왜 장애인들의 곁에 있어주지 않는가? 그들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정당화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자신들의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 그로 인한 과공감과 과몰입 때문에 건강한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 의식은 점점 증발된다. 사회 곳곳에서 아귀다툼 같은 갈들과 마찰이 점점 심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개인이 불행에도, 한 사회의 불행에도, 그 근본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피해의식에 대해 깊이 고찰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이유다.  

이전 07화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