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와 ‘현실’ 사이
“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그래서 넌 지금 부자들이 잘했다는 거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세금 안 내는 부자들은 다 박멸을 해버려야 돼.”
‘민찬’은 ‘당위’와 ‘현실’을 혼동한다. ‘당위’는 무엇인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은 무엇인가? ‘지금 그런 것(현상)’이다. ‘돈이 많은 이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이는 ‘당위’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위’와 별개로 ‘현실(현상)’은 그렇지 않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해 합법적 절세를 하거나 불법적 탈세를 한다.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민찬’은 이 ‘당위’와 ‘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바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심각한 문제가 바로 ‘당위’와 ‘현실’의 혼동이다. 피해의식은 ‘당위’(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와 ‘현실’(지금 그런 것)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 둘을 혼동하게 한다.
‘민찬’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그 피해의식은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들을 양산하고, 그렇게 양산된 부정적인 감정들은 서로 뒤엉켜 지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마비시킨다. 그것이 ‘민찬’이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구분할 수 있는,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된 이유다. 그렇다면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까?
피해의식의 두 해악, 불통과 파멸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불통이다. 피해의식으로 인해 발생한 ‘당위’와 ‘현실’ 사이의 혼동은 소통을 막아버린다. “돈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민찬’의 ‘당위’적 이야기에 친구는 답했다. “그렇긴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친구는 그저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민찬’은 갑자기 흥분하며 친구를 공격적으로 비난했다. “너 지금 부자들이 잘했다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이처럼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크고 작은 불통이 발생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파멸이다.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 이 파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기 파괴적인 파멸’과 ‘현실 파괴적인 파멸’이다. 쉽게 말해,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을 파괴하거나 세상을 파괴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유사 이래 ‘당위-현실’ 사이에 간극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과 ‘지금 그런 것’ 사이에는 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어 왔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을까? 인류가 노예제, 봉건제, 공산제, 자본제를 거치는 동안 단 한 번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한 세상이었던 적은 없다. 늘 더 많은 권력을 가진 특정한 계급(주인‧영주‧당‧자본가)이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당위-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어 왔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항상 있어 왔던 ‘당위-현실’의 간극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자기 파괴적인 파멸’이나 ‘현실 파괴적인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거대담론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시험에 떨어진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열심히 노력하면 시험에 붙어야 한다. 이는 ‘당위’이다. 하지만 이 당위적인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 아이가 이 자명한 삶의 진실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시험에 떨어진 자신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열심히 노력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게 된다. 전자는 ‘자기 파괴적인 파멸’에 이르는 길이고, 후자는 ‘현실 파괴적인 파멸’에 이르는 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을 원망하는 이는 결국 자기를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세상을 원망하는 이는 결국 세상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일 수에 없으니까 말이다.
‘민찬’ 역시 그런 상태다. “세금을 안 내는 부자들은 다 박멸해야 한다.” ‘민찬’의 이런 위험하고 폭력적인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이는 ‘당위-현실’의 간극을 성찰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과격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파멸’이나 ‘현실 파괴적인 파멸’로 이어진다.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당위’적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 ‘민찬’은 과도하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 분노는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민찬’을 ‘자기 파괴적인 파멸’ 혹은 ‘현실 파괴적인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
‘자기 파괴적’이 되거나 ‘현실 파괴적’이 되거나
‘자기 파괴적인 파멸’은 흔하다.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와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는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를 알고 있다. 그는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했다. 뒷돈을 주거나 아첨을 하지도 않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하지만 그는 꽉 막히고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갖가지 불이익을 받고 끝내는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세상은 정직하게 돌아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원망하며 술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당위-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이 너무나 쉽게 빠지는 ‘자기 파괴적인 파멸’의 길이다.
‘현실 파괴적인 파멸’도 있다. ‘당위-현실’을 혼동해서 발생한 분노는 다른 곳으로 튈 수도 있다. 이 분노는 현실 세계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니 현실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 파괴적인 파멸’의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 ‘민찬’의 분노는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당위’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 ‘민찬’은 부자들을 박멸해서 현실을 파괴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과 페미니즘
이런 피해의식의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부 사회‧정치적 운동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피해의식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사회‧정치적 운동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그중 심각한 문제가 바로 불통과 파멸이다. 페미니즘을 생각해보자. 페미니즘은 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왔던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정치적 운동이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남자들은 남자라는 이유로 많은 혜택을 누려 왔잖아. 그러니 이제 여자들의 권리가 더 중요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너 지금 남자 편 드는 거야? 남자들만 없어지면 다 해결돼!”
피해의식에 휩싸인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향상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여전히 기득권은 남성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그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둘 사이의 간극 역시 보지 못한다. 그저 ‘당위’가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고, ‘당위’가 ‘현실’이 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할 뿐이다.
그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소통이 없어지면 소외가 발생하고 이는 결국 ‘자기 파괴적인 파멸’이나 ‘현실 파괴적인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사회‧정치적 운동은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이는 비단 페미니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를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려는 많은 진보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정치적 운동일지라도 없느니만 못하다. 그것은 결국 불통과 파멸만을 낳을 테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이 ‘혁명’이 아닌 ‘난동’이 되는 이유
이는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역사 속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자기 파괴적인 파멸’과 ‘현실 파괴적인 파멸’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아보라. 이는 ‘혁명’이 아니라 ‘난동’일 뿐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난동. 이런 난동은 왜 일어났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피해의식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세력화 때문이다. 불통으로 인한 소외, 그로 인해 촉발된 (자기 파괴적 혹은 현실 파괴적) 파멸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난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파괴적인 ‘난동’을 일으킬 순 있어도 생성적인 ‘혁명’을 촉발할 순 없다. 물론 ‘혁명’도 ‘난동’처럼 무엇인가를 파괴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난동’의 파괴가 ‘파멸을 위한 파괴’라면, ‘혁명’의 파괴는 ‘생성을 위한 파괴’이다. 이는 당연하다. ‘난동’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다. ‘난동’은 (‘당위’와 ‘현실’ 사이에 혼란을 겪기 때문에) ‘당위’와 ‘현실’을 매개할 대안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생성적인 혁명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현실’은 왜 ‘당위’적인 ‘현실’이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고, ‘당위’적인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떼를 쓸 뿐이다. 그들은 ‘당위-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세상을 파괴해서 파멸하고 싶은 마음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지만 ‘혁명’은 다르다. ‘혁명’ 역시 무엇인가를 파괴하지만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생성할 수 있다. ‘혁명’은 ‘당위’와 ‘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이들만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위’(“세상은 이래야만 해.”)와 ‘현실’(“하지만 지금 세상은 이래.”)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이들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이들은 ‘당위’와 ‘현실’을 매개할 대안, 즉 ‘당위’적인 ‘현실’을 구현할 방법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혁명’은 무엇인가를 파괴하더라도, 그 파괴는 생성을 위한 파괴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혁명’의 시작은, 피해의식의 극복이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피해의식을 넘어설 때 진정한 ‘혁명’은 가능하다. ‘혁명’은 ‘당위-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고, 그 사이의 간극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지적인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즉, 아는 것이 없다고 ‘난동’을 부리고 더 많이 공부한다고 ‘혁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는 것이 없어도 ‘혁명’을 할 수 있고(동학 농민 운동!), 아는 것이 많아도 ‘난동’을 부릴 수 있다(1‧2차 세계 대전!). 많은 배운 이들 중에 자신의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해 불통이거나 파멸의 욕망에 휩싸인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반면 아는 것이 없거나 적어도 자신의 피해의식을 성찰해서 극복하면 자신도, 세상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일이다. 이것이 파괴적인 ‘난동’이 아닌 생성적인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첫걸음이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가? 여성들의 권리와 지위가 향상된 세상을 꿈꾸는가? 아니면 그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꿈꾸고 있는가? 책과 세상에서 눈을 떼고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게 만드는 우리 안의 피해의식을 잘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