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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나서 못되지는 마음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


 야박하게 말하자. 피해의식은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이다. 피해의식의 발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실제로 상처받지 않았지만(혹은 큰 상처가 아니었지만) 피해의식이 발생한 경우이고, 또 하나는 실제로 큰 상처를 받아서 피해의식이 발생한 경우다. 전자는 딱히 가난한 집에서 자라지도 않았으면서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경우이고, 후자는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경우다. 두 경우 모두 피해의식은 결과적으로 못된(나쁜) 마음이다.      

 먼저 전자부터 논의해보자. 실제로 가난했던 적도 없으면서 과도한 탐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는 이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얼마나 못됐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왜 못돼졌는가? 못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못남은 무엇인가? 성찰하지 않는 못남이다. 자신이 실제로 가난 때문에 상처를 받았는지, 받았다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스스로 성찰해보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왜곡하고 날조했을 뿐이다. 이는 얼마나 못난 일인가?


      

피해의식의 ‘핵’과 ‘막’


 피해의식은 ‘핵’과 ‘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세포가 핵과 막으로 구성된 것처럼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의 ‘핵’은 과도한 자기보호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핵’을 감싸고 있는 ‘막’이 있다. 그 ‘막’은 과도한 자기보호를 정당화하려는 마음이다. 세포핵을 세포막이 보호하듯, 피해의식의 ‘핵’(과도한 자기보호)은 그것을 둘러싼 ‘막’(자기정당화)에 의해 유지‧강화된다.

      

 피해의식의 ‘핵’(과도한 자기보호)이 ‘못난 마음’이라면, 피해의식의 ‘막’(자기정당화)은 ‘더 못난 마음’이다. 과도한 자기보호는 ‘못난 마음’이다. 과도한 자기보호는 자신 이외에 누구도 보호(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마음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자기정당화는 그보다 ‘더 못난 마음’이다. 과도한 자기보호의 마음은 (어렵기는 하겠지만) 누군가를 보호(사랑)하게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자기보호의 마음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은 누군가를 보호(사랑)해줄 일말의 가능성마저 닫아버린다.     

 “돈을 벌고 돈을 아껴서 나를 보호할 거야!(과도한 자기보호)”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가능성은 있다. 이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보호해줄 존재가 ‘돈’이 아니라 ‘너’라는 사실을 깨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돈을 벌고 돈을 아끼려는 것은 당연한 거야!”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이들은 그 가능성마저 없다. 이들은 피해의식의 ‘막’(자기정당화)에 둘러싸여 피해의식의 ‘핵’(과도한 자기보호)을 성찰해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제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겠다. 먼저 ‘막’을 찢어야 한다. 즉, 더 못나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마음(핵)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을 정당화하려는 마음(막)은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피해의식은 점점 더 옅어지게 된다. ‘막’이 얇아지는 만큼 ‘핵’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고, 또 점점 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상처받은 이들의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야박한 정의를 후자, 즉 실제로 상처 받은 이들에게도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 지독한 가난 때문에 상처 입은 이들이 있다. 이들 역시 과도한 탐욕 혹은 과도한 검약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준다. 이 역시 분명 피해의식이다. 이런 피해의식 마저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으로 쉽게 치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야박할 순 있어도 부당하진 않다. 

     

 상처 입은 이들의 피해의식 역시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들의 ‘못남’(무능)은 무엇인가? 현재를 살지 못하는 무능이다. 지난 일들을 지나가게 두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사는 이들은 무능하다. 안다. 이것이 얼마나 야박한 이야기인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큰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을까? 그 과거를 그저 지나가게 두고 지금을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상처받은 이들의 ‘못남’(무능)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지 못한 무능이다. 이들의 ‘못남’의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상처받은 피해의식 역시 ‘핵’과 ‘막’이 있다. 그렇다면 이 피해의식 또한 ‘막’(자기정당화)을 찢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깊은 상처를 가진 이들의 피해의식은, 그 ‘핵’도 ‘막’도 모두 견고하다. 지독한 가난을 겪은 이들이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마음(핵)과 그 마음을 정당화하려는 마음(막)은 매우 견고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막’은 견고하기에 그 ‘막’을 찢어서 ‘핵’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는 피해의식을 극복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잘남, 지금을 사는 지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본적인 해법은 같다. 못나지지 않으면 된다. 못나지지 않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소극적인 방식과 적극적인 방식. 소극적인 방식은 더 못나지지 않는(‘막’을 찢는) 방식이다. 즉, 자기정당화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적극적인 방식은 무엇인가? ‘잘난 사람’이 되는 방식이다. 이 ‘잘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인가? 그것은 모두 ‘잘남’(유능)이지만, 작은 ‘잘남’이다.

      

 이 작은 ‘잘남’은 피해의식의 마취제일 뿐, 치료제는 아니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가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해보자. 분명 그의 피해의식은 조금은 잦아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그는 자신보다 돈이 더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면 다시 피해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올 수도 있고,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다른 피해의식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진정으로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잘남(유능)’은 지혜다. 지혜로운 이들은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 지혜는 어떤 지혜인가? 지금을 살 수 있는 지혜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금 기쁨을 찾고 누릴 수 있는 지혜. 그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피해의식은 과거의 불행이 족쇄처럼 지금을 얽매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을 살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이는 야박할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해지지 않는다면 이를 수 없는 일이다.  

    

 ‘나의 피해의식은 내가 못나서 생긴 못된 마음이구나!’ 이처럼 조금은 야박하게 자신의 피해의식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처 받았든 상처받지 않았든, 피해의식은 생길 수 있다. 옳든 그르든,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이런 피해의식은 자기엄격성을 바탕으로 ‘못남’으로부터 멀어지고 ‘잘남’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때 점점 옅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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