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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촉매제, 자의식 과잉

관계에 대한 피해의식     


“소개팅 나가서 취조하는 것처럼 캐묻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왜 그렇게 사람을 의심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어. 사람 믿으면 안 돼.”     


 ‘미정’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상대를 의심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결례가 될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은근슬쩍, 때로는 취조하듯 이것저것 캐묻는다.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 피해의식 때문이다. 그녀의 피해의식은 무엇일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미정’은 사람을 믿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을 잠정적으로 자신에게 크고 작은 위해를 가할 존재들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온통 자신을 보호하는 데 온 마음이 쏠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왜 이런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미정’은 늘 엄마에게 사랑받았다. 그녀의 엄마는 헌신적이었고, 늘 따뜻한 미소와 친절함으로 그녀를 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엄마의 세상은 무너졌다. 그날 이후 한동안, 엄마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함은 사라졌다. 때로는 남편과 소리 지르고 싸우느라, 때로는 혼자 방안에서 우느라 엄마는 ‘미정’을 잘 돌보지 못했다.      


 ‘미정’은 그 일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늘 따뜻한 미소로 자신을 보살펴줄 것이라 믿었던 존재에게 차갑게 버림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상처의 기억 때문에 ‘미정’은 어른이 되어서도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녀가 피해의식에 휩싸여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빠와 엄마를 믿었듯, 다시 누군가를 믿게 된다면 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의 원인은 상처받은 기억일까?

     

 ‘미정’의 피해의식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빠의 불륜, 그로 인한 엄마의 상실감, 그렇게 사라져버린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 이 상처의 기억이 ‘미정’의 피해의식의 원인이다. 그런 상처가 없었다면, ‘미정’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집요하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의아한 지점이 있다. ‘미정’과 유사한 상처를 갖고 있는 이들 중 관계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도 많다.     


 ‘재선’은 ‘미정’과 유사한 상처를 갖고 있다. 어머니의 불륜 때문에 ‘재선’의 부모는 몇 해를 싸우다 이혼을 했다. ‘재선’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재선’의 상처는 ‘미정’의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일 수 있다. ‘미정’의 어머니는 곧 자신의 상실감을 추스르고 따뜻한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재선’의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와 결혼을 해서 떠나버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재선’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피해의식이 매우 옅다. ‘재선’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결례가 될 만큼 상대를 의심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기억이 피해의식을 결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라면 ‘재선’의 상황은 납득되지 않는다. 상처받은 기억은 피해의식을 유발하는 원인이지만, 그 원인만으로 피해의식이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의식이라는 화학 작용

     

 피해의식의 발생은 단순하지 않다. 이는 마치 미묘한 차이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는 화학 반응과 같다.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화학 실험을 하나 해보자. 맑은 물이 가득 찬 비커에 검은색 결정체 하나를 떨어뜨린다고 해보자. 이때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 검은색 결정체가 녹아서 물 전체가 검게 물드는 경우와 그 검은색 결정체가 녹지 않은 채로 가라앉는 경우다. 이 간단한 실험으로 우리의 피해의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비커의 ‘맑은 물’을 우리의 마음으로, ‘검은 결정체’를 상처받은 기억이라고 하자. 그 ‘검은 결정체’가 용해되어 생긴 ‘검은 물’이 바로 피해의식이다. 검은 결정체(상처받은 기억)는 분명 검은 물(피해의식)의 원인이다. 하지만 그 검은 결정체를 맑은 물에 넣는다고 해서 반드시 검은 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은 결정체가 물속에서 용해될 때만 검은 물이 된다. 반대로 물속에서 용해되지 않는다면 검은 결정체는 가라앉아 하나의 점이 될 뿐, 검은 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검은 결정체는 어떤 경우에 용해가 되고 어떤 경우에 용해가 되지 않는 것일까? 화학 반응(용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를 활성화 에너지라고 하는데, 이는 특정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벽의 높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결정체가 물에 용해되기 위해서는 이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하다. 즉, 검은 결정체가 물에 녹는다면 그 조건 자체로 이미 활성화 에너지 이상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고, 검은 결정체가 물에 녹지 않는다면 주어진 조건만으로는 활성화 에너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피해의식의 촉매제, 자의식 과잉

     

 그런데 주어진 조건이 활성화 에너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검은 결정체가 용해될 때가 있다. 바로 ‘촉매’를 첨가할 때다. 촉매는 무엇인가?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를 높이거나 낮추는 물질이다. 검은 결정체(상처받은 기억)를 물(마음)에 넣는 것만으로는 용해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촉매를 첨가하면 반드시 용해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이라는 화학 반응에서 ‘촉매’는 무엇일까? 바로 자의식 과잉이다.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맑은 물)에 상처(검은 결정체)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조건만으로 그 검은 결정체는 용해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마음에 하나의 점으로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반대로 그 점이 녹아서 마음 전체를 검게 할 수도 있다. 바로 자의식 과잉이라는 촉매가 첨가될 때다.      


 자의식 과잉은 무엇일까? ‘자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의식을 말한다. 그러니 자의식 과잉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의식이 과잉되어 있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자의식 과잉은 온통 ‘나’만 생각하느라, ‘나’의 문제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는 마음 상태다. 그래서 자의식 과잉은 ‘타자’의 마음을 고려하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자의식 과잉은 ‘윤리’(좋다-나쁘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지혜’(성숙-미숙)의 문제다. 달리 말해, 자의식은 과잉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유아적인 것이다.


   

     

자의식 과잉 VS 이기심


 이는 자의식 과잉과 이기심을 구분하는 것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자의식 과잉은 이기심과 쉽게 혼돈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나’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 상태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명백히 다르다. 이기심은 손해 보지 않고 이득을 보려는 마음이다. 이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려 할 때, 자의식 과잉 상태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더 이익을 챙기려면 ‘나’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항상 ‘남’을 생각해야 한다. 이익과 손해는 언제나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측정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은 다르다. 자의식 과잉은 (‘나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나’ 그 자체만 생각하느라 ‘남’(타자)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마음 상태다. 이기심이 “네가 나를 안 좋아하면 나도 너를 안 좋아할 거야!”라는 마음이라면, 자의식 과잉은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안 좋아할 수가 있어?”라는 마음이다. 말하자면, 자의식 과잉은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며 타자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조연이나 엑스트라라고 여기는 마음 상태인 셈이다. 이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유아적인 마음이다.      

 

 아이들을 생각해보라. 아이들은 친구에게 선물을 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물한다. 왜 그럴까? 이는 ‘네가 뭘 원하든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줄 거야’ 혹은 ‘네가 준 것보다 싼 선물을 줄 거야’와 같은 나쁜 마음(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유아적인 아이들은 자의식이 과잉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온통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늘 ‘나’의 문제가 마음에 걸려 있는 상태고, 그 때문에 ‘타자’(친구)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그러니 유아적인 이들은 내가 좋아하는(싫어하는) 것을 상대도 당연히 좋아할(싫어할)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떤 선물을 하던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당연히 좋아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 자의식 과잉이 피해의식을 유발하는 촉매제다.  


    

자의식 과잉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촉발하는가?

     

 다시 ‘미정’과 ‘재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미정’과 ‘재선’은 둘 다 상처받은 기억을 갖고 있다. 즉, 둘 다 비커의 물(마음)에 검은 결정체(상처받은 기억)가 떨어져 있는 상태다. 하지만 ‘미정’의 검은 결정체는 용해되어 검은 물(피해의식)이 되었고, ‘재선’의 검은 결정체는 용해되지 않아 작은 점으로 남았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촉매’의 차이다. ‘미정’의 마음에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촉매제’가 첨가되었고, ‘재선’의 마음에는 그 ‘촉매제’가 첨가되지 않았다.    


 ‘미정’은 왜 피해의식 생겼을까? 엄마에게 상처받아서? 아니다. 자의식 과잉 때문이다. ‘미정’은 온통 ‘나’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였다. 반대로 ‘재선’이 피해의식에 벗어난 것은 자의식 과잉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자의식 과잉으로부터 벗어나면 ‘나’가 아니라 ‘너’가 보인다. ‘재선’ 역시 한 동안 어머니를 미워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어머니를 무던히도 미워했다.   

  

 하지만 ‘재선’은 어느 순간, 어머니 역시 자신과 동등한 욕망과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존재인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자신과 유사한 혹은 더 큰 상처를 가진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나’만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나’와 동등한 수많은 ‘너’가 보인다. 자의식 과잉 상태에서 벗어난 ‘재선’에게 어머니에게 상처받은 기억은 그저 하나의 점일 뿐이다.     

 

 이제 ‘미정’이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유도 알겠다. 그녀의 과잉된 자의식 때문이다.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은 ‘엄마(아빠)’를 볼 뿐, ‘한 여자(남자)’를 보지 못한다. ‘미정’에게 엄마는 주인공인 자신을 돌봐주는 역할을 하는 조연일 뿐이다. 자신을 당연히 보살펴주어야 할 존재가 그러지 않으니 ‘미정’은 피해의식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 상처는 누구한테나 있어.” ‘미정’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이는 당연하다.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에게 타자의 고통과 상처는 보일 리 없고, 그래서 그것을 보라는 말은 가장 화나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은 ‘나’의 상처와 고통만을 볼 수밖에 없고, 또 보고 싶어 한다. 피해의식을 심한 이들을 돌아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유아적인 자의식 과잉 속에 있다. 그들은 항상 아이처럼 온통 ‘나’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그래서 엄존하는 ‘타자’를 보지 못하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맑은 물’에 ‘검은 결정체’가 떨어져도 그것은 녹지 않는다. 검은 결정체는 오직 자의식 과잉이라는 촉매가 작동할 때만 녹아서 검은 물을 만든다.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기억은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 피해의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피해의식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조건 안에서만 결정된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검은 결정체’를 문제삼지 말고 ‘촉매’를 잘 살펴야 한다. 과잉된 자의식을 덜어내는 만큼, 우리의 피해의식 역시 옅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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