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폭력, 언어적 폭력, 상황적 폭력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가? 누군가에게 특정한 상처를 받아서 생긴다. 그리고 상처를 유발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렇다. 피해의식을 유발하는 중요한 원인은 중 하나는 폭력이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일 수도 있고, 언어적 폭력일 수도 있고, 상황적 폭력일 수도 있다.
물리적 폭력은 피해의식을 유발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물리적 폭력을 당했던 이들은 권력자‧권위자(교수‧상사‧사장…)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다. 누군가가 높은 직급에 있거나 권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근거 없는 반감을 갖게 되는 마음이 이런 경우다. 언어적 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뚱뚱하다고 놀림 받는 언어적 폭력을 당했던 이들은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다.
물리적‧언어적 폭력이 아닌 폭력, 즉 상황적 폭력도 있다. 이 역시 피해의식을 유발한다. 상황적 폭력은 무엇인가? 물리적‧언어적 폭력 없이도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이다. 쉽게 말해 무관심의 폭력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소외되었던 경험으로 인해 관계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반응에도 자신만 혼자 남겨졌다고 여기게 되는 마음이 이런 경우다. 이런 피해의식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다수의 무관심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러한 무관심 역시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누군가가 행사했던 크고 작은 물리적‧언어적‧상황적 폭력 때문에 발생한다. 물리적‧언어적 폭력은 ‘화난 얼굴’로, 상황적 폭력은 ‘무표정한 얼굴’로 피해의식을 유발한다. 그런데 피해의식을 유발하는 폭력은 이것뿐일까? 아니다. 기묘한 폭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미소 띤 얼굴’의 폭력이다. 화난 얼굴도, 무표정한 얼굴도 아닌 미소 띤 얼굴로 가해지는 폭력이 있다. ‘미소 띤 폭력’은 무엇일까?
미소 띤 폭력
“너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청소해줄게.”
‘재정’은 언제나 자상하다. ‘재정’은 누구를 만나든 상대를 배려한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친구들이 배고플까 봐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힘들까 봐 먼저 집 청소를 한다. 바로 이것이 ‘미소 띤 폭력’이다.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재정’의 자상한 배려가 어째서 폭력이란 말인가? ‘재정’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러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보다 상대가 중요하기 때문일까? 혹은 자신은 원하는 바가 없어서일까? 둘 다 아니다.
‘재정’은 왜 친구들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을까? 친구들이 배고플까 봐? 아니다. 자신이 배가 고파서다. ‘재정’은 “내가 배고프니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기 싫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친구들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배고파서 밥을 먹으러 간 것으로 하면, 자신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라 친구들이 미안해야 할 일이 된다. 이것이 ‘재정’이 “너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라는 자상한 배려를 했던 속내다.
‘재정’은 왜 집 청소를 했을까? 아내가 불편할까 봐? 아니다. 자신의 결벽증 때문이다. ‘재정’은 아내에게 “집안이 정리정돈되지 않은 걸 견디기 힘들다.”라고 말하기 싫은 것이다. 정직한 속마음을 말하면 그것은 자신이 아내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기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청소할게”가 아니라) “내가 청소해줄게”라고 말하면, 자신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라 아내가 미안해야 할 일이 된다. ‘재정’은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신은 미안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미안함을 유발하려 한다. 이것이 ‘재정’의 자상한 미소 뒤에 가려진 배려의 맨얼굴이다.
부채감이라는 폭력
폭력은 무엇인가? 화난 폭력(물리적‧언어적 폭력)과 무표정한 폭력(상황적 폭력)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상대에게 부당하게 부채감을 안겨주는 행동 역시 일종의 폭력이다. 부채감이 무엇인가? 상대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은근슬쩍 자신이 미안할 일은 은폐하고, 상대에게 과도한 미안함을 유발하는 행동은 심각한 상처를 야기한다. 그러니 이런 부당한 부채감을 주려는 행동 역시 폭력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이런 부채감을 유발하는 폭력은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자행된다. 그래서 이는 더욱 심각한 폭력일 수 있다. 물리적‧언어적‧상황적 폭력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그런 폭력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나를 때렸던 사람들, 나를 욕했던 사람들, 나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눈에 보인다. 그때 증오의 대상은 명확하다. 하지만 부채감을 유발하는 폭력은 다르다. 그 폭력은 미소 뒤에 가려져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부터 발생한 증오는 갈 곳 잃은 증오다. 그 증오는 갈 곳이 없기에 안으로 곪아서 엉뚱한 곳에서 터질 수 있다.
“나는 괜찮은데, 너 피곤하면 다음에 보자.” 자신이 피곤해서 약속을 취소하고 싶을 때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다. “지금 바쁘긴 한데, 업무처리 해줄게요.”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생색을 내는 동료가 있다. 이런 부채감을 주는 이들과 함께 있어본 적이 있을까? 분명 미소 띤 얼굴로 우리를 배려해주는 것 같은데, 뭔가 기묘한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 기묘한 불쾌감과 불편함의 정체를 알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폭력에 의해 발생한 갈 곳 잃은 증오다. ‘미소 띤 폭력’만큼 우리네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폭력도 없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잔인한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이니까 말이다.
호의에 대한 피해의식
부당한 부채감 역시 피해의식이 된다. ‘원채’는 ‘재정’의 아내다. ‘원채’는 부쩍 피해의식이 짙어졌다. ‘원채’의 피해의식은 무엇일까? 바로 호의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원채’는 누군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면 과민하게 반응한다. “전 이런 거 부담스러워요.” 지인들의 작은 선물이나 따뜻한 배려에도 과도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는 피해의식이다. 누군가의 호의로부터 자신을 과도하게 방어하려는 피해의식.
‘원채’는 왜 이런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재정’ 때문이다. ‘원채’는 ‘재정’과 긴 시간 함께 지내면서 기묘한 슬픔에 잠식당했다. ‘원채’는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는데도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안한 마음에 늘 짓눌려 있다. 이 부당한 부채감은 마음 한편에 상처가 된다. 어떤 상처든 지속되면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 부당한 부채감 역시 마찬가지다. 부당한 부채감이 지속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
부당한 부채감이라는 폭력은 심각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늘 미소 뒤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상처 역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치료할 곳을 찾지 못해 더 곯듯이, 부당한 부채감은 우리의 내면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것이 ‘원채’가 엉뚱한 곳에서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게 된 이유다. ‘원채’가 거부해야 할 호의는 ‘재정’의 기만적 호의이지, 지인들의 순수한 호의가 아니다.
미소 띤 폭력을 상대하는 법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방법을 하나 알 수 있다. 그것은 부당한 부채감을 주려는 이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은근슬쩍 우리에게 부채감을 주려는 이들을 가급적 멀리하는 것이 좋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그것이 어렵다면, 그들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혹은 그 기만적인 호의의 맨얼굴을 폭로해야 한다.
“너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네가 배고파서 밥 먹으러 가자는 거 아니야?”
“내가 청소해줄게.”
“같이 사니까 청소는 당연히 같이 하는 거지. 뭘 자꾸만 해준다는 거야?”
“나는 괜찮은데, 너 피곤하면 다음에 보자.”
“네가 피곤해서 약속 취소하고 싶은 거 아니야?”
“지금 바쁘긴 한데, 업무처리 해줄게요.”
“그건 원래 김 대리님 업무인데, 뭘 자꾸만 해준다는 거예요?”
이것이 ‘미소 띤 폭력’을 상대하는 법이다. 부당한 부채감은 피해의식을 점점 더 짙어지게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빌리지도 않은 돈을 자꾸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 상태와 유사하다. 미안할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 때 어떻게 피해의식이 짙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 우리에게 부당한 부채감을 안기려 할 때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동시에 스스로에게 아프게 물을 수도 있어야 한다. 바로 내가 그 미소 띤 폭력을 누군가에게 행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때 ‘나’와 ‘너’와 ‘우리’의 피해의식은 점점 옅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