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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권력-욕망-금지-의무’의 사면체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     


“주말에 독서 모임 같이 할래?”
“싫어. 다 커서 무슨 공부야. 책 읽는 거 딱 질색이야.”     


 ‘주민’은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주민’에게는 어떤 상처가 있을까? 공부를 못해서 받은 상처? 아니다. ‘주민’의 피해의식은 공부를 못해서 생긴 피해의식이 아니다. ‘주민’은 학창 시절 공부를 곧잘 했다. ‘주민’의 피해의식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것이 ‘주민’이 친구가 함께 책을 읽자고 했을 때, 과도하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는 ‘주민’만의 특별한 피해의식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곧잘 했으면서 어른이 되면 공부와 담쌓고 지내는 이들은 흔하다. 이는 일종의 피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과도하게 공부했던 기억이 상처가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쳐다보기도 싫어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부고, 그 공부 중에는 삶을 명랑하고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공부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공부라면 질색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피해의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 수 있다.      



피해의식, ‘욕망-금지-의무’의 변주곡

    

 피해의식은 욕망과 금지, 그리고 의무가 만들어내는 변주곡이다. 욕망은 ‘하고 싶다’이고, 금지는 ‘하지 마’이고, 의무는 ‘해야 해’이다. 어떤 피해의식이든, 그것은 ‘하고 싶다’(욕망)라는 마음과 ‘하지 마’(금지)라는 마음과 ‘해야 해’(의무)라는 마음이 뒤엉켜 발생하게 된다.  

    

 ‘주민’의 피해의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학창 시절, ‘주민’의 욕망은 ‘놀고 싶다’였다. ‘주민’은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민’의 부모는 늘 ‘놀지 마!’라며 이를 금지했다. 이 ‘놀지 마’라는 금지는 단순한 금지가 아니다. 이는 ‘공부해야 해’라는 의무가 만들어내는 금지다. 욕망(‘놀고 싶다’), 그리고 그 욕망을 억압하는 의무(‘공부해야 해’)가 만들어내는 금지(‘놀지 마’). 이 ‘욕망-의무-금지’라는 삼각형 구도 안에서 피해의식은 발생하게 된다.      


 다른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돈과 성性에 관한 피해의식을 예로 들어보자. 돈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고,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런 돈에 관한 피해의식은 왜 발생하는가? 욕망(‘돈을 쓰고 싶다’)과 의무(‘돈을 아껴야 해’)가 만들어내는 금지(‘돈을 쓰지 마’)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장난감을 사고 싶었던(욕망)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부모는 항상 ‘돈을 아껴야 한다’(의무)고 말했다. 이때 아이는 ‘쓸데없는 데 돈을 써서는 안 된다’(금지)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한 아이에게 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생기는 과정이다.

       

 성에 관한 피해의식도 마찬가지다. 성에 관한 주제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고, 성적인 문제에 대해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런 성에 관한 피해의식은 왜 발생하는가? 이 역시 마찬가지다. 성에 관한 피해의식은 욕망(‘섹스하고 싶다’)과 의무(‘정숙하게 살아야 해’), 금지(‘섹스하지 마’)가 만들어내는 정신적 분열 현상이다. 성욕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에게 정숙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내세운다. 이때 성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된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성에 관한 피해의식이 발생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어떤 피해의식이든, 그것은 ‘욕망-금지-의무’라는 삼각형 구도 안에서 발생하게 된다.      


피해의식, ‘권력-욕망-금지-의무’의 사면체

  

 여기서 우리는 피해의식이 개인적인 문제인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피해의식은 ‘욕망-금지-의무’라는 삼각형 구도 안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삼각형을 완성시키는 힘은 무엇인가? 바로 ‘권력’이다. ‘권력’(부모)은 ‘의무’(‘공부해야 해’)를 요구하기 위해 ‘욕망’(‘놀고 싶다’)을 ‘금지’(‘놀지 마’)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촉발되는 내적 논리다. 이 논리는 다른 피해의식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일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일이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항상 자기만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일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고, 일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을 과도하게 방어하려고 한다. 이런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가? ‘권력’(사장)이 ‘의무’(‘일해야 해’)를 요구하기 위해 ‘욕망’(‘쉬고 싶다’)을 ‘금지’(‘쉬지 마’)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발생한다. 이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의식을 도형화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사면체의 형상을 띤다. ‘권력’을 꼭짓점으로 바닥의 ‘욕망-금지-의무’라는 삼각형의 세 점을 이은 사면체. 사면체는 네 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의 삼각형과 꼭짓점과 맞닿은 나머지 세 면의 삼각형. 즉, 피해의식이 ‘꼭지점(권력)-삼각형(욕망-금지-의무)’의 사면체라면, 피해의식에는 세 개의 삼각형이 더 존재하게 된다. ‘권력-의무-욕망’의 삼각형, ‘권력-금지-욕망’의 삼각형, ‘권력-금지-의무’의 삼각형이다. 이 세 개의 삼각형을 통해 피해의식이 우리의 내면을 어떻게 뒤트는지 알 수 있다.      



‘권력-의무-욕망’의 삼각형 : 의무의 욕망화!


 ‘권력-의무-욕망’의 삼각형부터 살펴보자. 이 삼각형은 ‘의무의 욕망화’를 촉발한다. 즉, ‘권력’(부모)은 ‘의무’(공부)를 ‘욕망’하게 만든다. 마음껏 뛰어놀고 싶은 아이가 있다. 하지만 부모는 ‘공부해야 해’라는 의무를 강하게 반복했다. 그때 아이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아이는 ‘의무’를 ‘욕망’하게 된다. 쉽게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정한 ‘의무’를 ‘욕망’하게 된다. “제가 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잿빛 표정이 된 아이들의 흔한 말이 이를 방증하지 않는가. 이는 아직 미숙한 아이들의 마음 상태이기만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쉬고 싶은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자본(권력)은 ‘돈을 벌어야 해’라는 의무를 강하게 반복한다. 그때 그 직장인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그는 ‘의무’를 ‘욕망’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쉬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본)이 지정한 의무(일)를 욕망하게 된다. “제가 하고 싶어서 일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잿빛 표정이 된 직장인들의 흔한 말 아닌가. 이처럼 ‘권력’이 ‘의무’를 ‘욕망’화하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의무의 욕망화! 이는 피해의식이 우리의 내면을 뒤틀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권력-금지-욕망’의 삼각형 : 금지의 욕망화! 

    

 ‘권력-금지-욕망’의 삼각형을 살펴보자. 이 삼각형은 ‘금지의 욕망화’를 촉발한다. 이는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뒤틀어 놓을까? ‘권력’은 ‘금지’를 ‘욕망’하게 만든다. 다시 아이와 직장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부모(권력)는 아이에게 노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했다. 이 금지가 반복되면 아이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금지’(‘놀지 마’)를 ‘욕망’하게 된다. 시험을 끝내고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가도 아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아이는 놀지 않는 것(금지)을 욕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인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자본 혹은 사장(권력)은 직장인에게 쉬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한다. 그 금지가 반복될 때, 직장인은 금지(‘쉬지 마’)를 욕망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혹사될 정도로 일에 치인 직장인들은 흔하다. 그들 중 마음 편히 휴가를 쓰거나 휴직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다. 이는 경제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돈이 있어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들이 쉬지 못하는 것은 쉬지 않는 것(금지)을 욕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지의 욕망화! 이는 피해의식이 우리의 내면을 뒤틀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권력-금지-의무’의 삼각형 : 금지의 의무화!


 ‘권력-금지-의무’의 삼각형 역시 이와 유사한 논리로 우리의 내면을 뒤틀어놓는다. 이 삼각형은 ‘금지의 의무화’를 촉발한다. ‘권력’은 무언가를 ‘금지’함으로써 그것을 ‘의무’화한다. 부모와 자본이라는 권력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부모(권력)는 노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금지를 의무화한다. 노는 것을 항상 금지 당해왔던 아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마음 편히 놀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금지’(놀지 않는 것)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의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자본)은 쉬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금지’를 ‘의무’화한다. 쉬는 것을 금지 당해왔던 직장인은 회사를 그만둬도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금지’(쉬지 않는 것)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의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금지의 의무화! 이렇게 피해의식은 우리의 내면을 강력하게 뒤틀어 놓는다.      



피해의식이라는 사면체가 말해주는 두 가지 삶의 진실


 사면체로서 작동하는 피해의식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삶의 진실을 알려준다. 첫째는 피해의식은 사회적인 문제라는 사실이다. 물론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문제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뒤틀어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이 뒤틀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 ‘권력’에 있다. 피해의식이라는 사면체의 꼭짓점에는 ‘권력’이 있다. 피해의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문제인 셈이다.      


 둘째는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행복이 무엇인가? 행복은 자연스러운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욕망하고,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금지하는 자연스러운 마음. 이 자연스러운 마음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가?      


 의무의 욕망화(해야만 하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 금지의 욕망화(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고 싶은 마음), 금지의 의무화(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만 하는 마음)이다. 이는 모두 피해의식으로부터 온 마음들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피해의식을 극복한 만큼만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을 복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것은 긴 시간 우리를 속박하던 불행의 사슬을 끊어내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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