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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

절대적 피해자의 탄생

     

 ‘정윤’은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다. 그 상처는 ‘정윤’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정윤’은 지금도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산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자신을 비난하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에게 조금만 무관심하거나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따돌림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정윤’은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위축되고, 또 누군가를 근거 없이 경계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은 ‘정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정윤’의 불행은 개인적 삶에서 멈추게 될까?   

  

“어제 뭐했어?”
“장애인 학교에 자원봉사 다녀왔어.”
“좋은 일 했네.”
“너도 같이 할래?”
“아니야. 근데 장애인 학교에는 장애인만 다니지?”
“그렇지.”
“좋겠다. 장애인들은 왕따 안 당하겠네.”

      

 ‘정윤’은 장애인 자원봉사를 다녀온 ‘민주’를 만났다. 같이 자원봉사를 하자는 ‘민주’의 말에 ‘정윤’은 시큰둥하다. ‘정윤’은 장애인들에게 기묘한 부러움을 느낀다. ‘모두가 장애인인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할 일이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윤’은 장애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정윤’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정윤’의 세상에는 왕따와 왕따 아닌 이들만 존재할 뿐이다. 온통 자신의 상처밖에 보이지 않는 ‘정윤’에게 장애인들의 상처와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피해의식의 중요한 특성 하나를 알 수 있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을 절대적인 피해자의 자리로 위치시킨다. 즉, 피해의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이들보다 자신이 가장 큰 피해(상처)를 받은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 상태다. 다시 묻자. ‘정윤’은 왜 장애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했을까?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장애인들보다 더 큰 피해(상처)를 받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큰 피해자로 여길 때 타인을 향한 그 어떤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


       

‘절대적 피해자’라는 망상

     

 객관적으로 보자면 ‘정윤’의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어떻게 ‘정윤’이 장애인들보다 더 큰 피해자일 수 있을까? 학창 시절 왕따의 상처가 어떻게 (선천적인 혹은 불운한 사고 때문에) 신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들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일 수 있을까? ‘정윤’은 마치 사지가 절단된 이들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손톱이 빠진 아픔이 더 큰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피해의식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현실적 인식으로 바꿔놓는다. 이것이 ‘정윤’이 장애인들에게 작은 도움조차 줄 수 없는 이유다. ‘정윤’은 장애인들에게 관심이나 연민은커녕 오히려 기묘한 부러움을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비단 ‘정윤’만의 일일까? 

     

 ‘찬성’은 가난 때문에 상처받았다. 이것은 그의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되었다. ‘찬성’은 통장 잔고가 줄어들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불안하다. 그뿐인가? 그는 돈 걱정 없이 사는 부자들을 향한 근거 없는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그가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은 어느 아이의 삶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이의 삶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쟤는 이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겠네. 보험금 빵빵하게 나올 테니까.” 

    

 ‘찬성’은 사이코패스일까? 그렇지 않다. 그가 그런 참혹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찬성’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그에게 세상은 ‘돈 있음(행복)’과 ‘돈 없음(불행)’으로 구분될 뿐이다. ‘찬성’의 인식 속에서 과거 돈 때문에 상처받은 자신, 지금도 돈이 없어 상처받고 있는 자신보다 더 큰 피해자는 없다. 그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해, 피해의식이 야기한 그 지독한 자기연민이 부모 잃은 한 아이의 고통을 가렸을 뿐이다.  


     

절대적 가해자의 탄생

 ‘희원’은 어린 시절부터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다. 그 상처는 ‘희원’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희원’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다. 다시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림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희원’은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근거 없는 분노와 두려움, 만성적인 열등감과 무기력, 우울함에 시달리며 산다. 이 피해의식은 ‘희원’의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다. ‘희원’의 불행은 개인적 삶에서 멈추게 될까?      


“희원씨, 어제 뉴스 봤어요? 다시 강도 사건이랑 소매치기 사건이 늘었대요.”
“그게 어디 그 사람들만의 잘못이겠어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참, 그런데 김 대리님, 어제 소개팅 했다면서요. 어떻게 됐어요?” 
“좀 별로였어요.”
“왜요?”
“제 생각보다 좀 많이 뚱뚱하더라고요.”
“김 대리님 그런 사람이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해요.”     

 ‘김 대리’는 ‘희원’과 평소 좋은 관계로 지내던 동료였다. ‘희원’은 평소처럼 ‘김 대리’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김 대리’의 소개팅 이야기가 나왔다. ‘김 대리’는 상대의 외모 때문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희원’은 ‘김 대리’에게 강한 실망감‧반발심‧적대감이 들었다. ‘희원’은 ‘김 대리’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날 이후 몇 년을 지속해오던 좋은 동료 관계는 불편하고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희원’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피해의식의 또 하나의 특성을 알 수 있다. 피해의식은 너무 쉽게 한 사람을 절대적인 가해자로 위치시킨다. 피해의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피해의식을 촉발하는 대상을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을 유발하는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희원’이 ‘김 대리’에게 강한 실망감과 반발심, 적대감이 든 이유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김 대리’를 파렴치하고 잔혹한 가해자로 여기게 되었다. ‘희원’은 지금은 ‘김대리’를 강도와 소매치기보다 더 파렴치하고 잔혹한 가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절대적 가해자’라는 망상

       

 객관적으로 보자면 ‘희원’의 생각은 부당하고 부조리하다. ‘희원’은 강도와 소매치기에 대해서는 관대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김 대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강도와 소매치기보다 ‘김 대리’를 더 큰 가해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폭력으로 겁박하는 강도와 지갑을 훔치는 소매치기보다 어떻게 ‘김 대리’가 더 큰 가해자일 수 있을까? ‘희원’은 마치 연쇄살인범보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 이가 더 큰 범죄자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피해의식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현실적 인식으로 바꿔놓는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자신의 피해의식을 촉발시키는 이들을 너무 쉽게 절대적인 가해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것은 비단 ‘희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주’는 성차별로 인해서 상처받았다.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차별을 받았다. 그 상처는 ‘인주’의 성gender에 대한 피해의식이 되었다. ‘인주’는 늘 남자를 경계하고 남자들과 있을 때 불안하다. 그뿐인가? 자신감 있는 남자들을 ‘마초’라고 여기며 적개심에 휩싸인다. 그런 ‘인주’가 길거리를 지나다 아이를 목에 태우고 걷고 있는 아빠를 보며 말했다. “어휴, 저런 한남(한국남자) 새끼들은 다 사라져야 돼!”   

   

 ‘인주’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는 장면에서 ‘인주’가 저주의 말을 내뱉었던 건 그녀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그녀는 성에 대한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그녀에게 세상은 ‘가해자인 남성’과 ‘피해자인 여성’으로 구분될 뿐이다. 그런 ‘인주’에게 천사 같은 미소를 가진 아이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와 아빠는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기에 ‘가해자인 남성’일 뿐이다. 이런 착시 현상은 왜 발생했을까? 바로 피해의식이 절대적인 가해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뿐만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이와 유사한 이들까지 절대적인 가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인주’는 실제로 아버지, 선생, 선배, 직장 동료 등등에게 성차별을 받았다. 그 상처가 피해의식이 되었을 때, 그 상처를 준 이는 다른 어떤 가해자들보다 더 파렴치하고 잔혹한 절대적인 가해자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피해의식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준 이들(아버지‧선생‧선배‧직장 동료…)뿐만이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이들과 유사한 이들(남성)까지 절대적인 가해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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