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확대 재생산하는가?
피해의식 확대 재생산의 중심, 언론
피해의식은 거대한 감옥이다.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는 감옥. 이 거대하고 견고한 감옥은 혼자 만들 수 없다. 이 감옥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많은 이들이 공모하고 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공모자가 있다. 바로 언론이다. 세상 사람들의 잠재적인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동시에 확대 재생산하는 중심에는 언론이 있다. 물론 모든 언론사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보수 일간지를 중심하는 일부 언론사들이 그렇다.
그 일부 언론사들은 왜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가? 자신이 속한 이해 집단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다. 이런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편가르기다. 내 편과 네 편을 선명하게 대립시킬 때 특정 이해 집단은 큰 이익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일부 언론사들이 피해의식을 활용하는 이유다. 누군가의 피해의식을 자극하는 것보다 내 편과 네 편을 대립시키는 데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가?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상처가 곧바로 피해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가 ‘나’에게만 일어났다고 여기거나 혹은 ‘나’의 상처가 유독 큰 상처라고 믿을 때 피해의식은 촉발되고 증폭된다. 일부 언론사들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파고들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언론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유발하는가?
일부 언론사들은 특정 집단의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자신의 당파적 이익을 챙긴다. 이는 일부 언론이 젠더 갈등, 세대 갈등, 빈부 갈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젠더 갈등부터 이야기해보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소설은 ‘김지영’이라는 한 여성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화제를 넘어 여성 운동Feminism Movement을 환기하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어찌 보면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한 여성의 인생 이야기가 어떻게 베스트셀러를 넘어 사회적 현상이 된 것일까? 그것은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는 남성중심적 권력 구조 때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한국 사회는 긴 시간 남성중심적 사회였다. 그로 인한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은 공기처럼 존재해왔다. 그런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공기처럼 존재했기 때문일 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남성중심적 권력이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억압하고 착취해왔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이어질 만큼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였다.
이때 일부 보수 언론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90년생 김지훈’, ‘79년생 정대현’ 등을 언급하며 고통받는 남자의 삶을 다룬 기사들을 연이어 내보냈다. 군복무 문제, 취업 문제, 가족 부양 부담, 남성 역차별 등등 남성이기 때문에 받는 다양한 불이익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여자들만 힘든 게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이 더 큰 피해받고 있다”는 논조의 기사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이런 기사들은 일부 남성들(혹은 남성중심주의를 내면화한 일부 여성들)에게 어떻게 작용했을까? 이런 기사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자신(남성)만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의 상처(고통)가 유독 큰 상처라고 여기게 된다. 즉, 군대를 가는 것, 취업이 어려워진 것,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것, (남자이기 때문에) 거꾸로 차별받는 것이 예외적이고 큰 상처(고통)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촉발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상처의 반복적인 확인은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면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보존’과 ‘타자공감’의 마음이 공존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일차적으로 느낀다. 이 상처와 아픔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기보존’의 욕망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공감과 교감의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처받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자기보존’과 ‘타자공감’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마음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과도하고 반복적으로 부각시킬 때, ‘자기보존’의 마음은 커지고 ‘타자공감’의 마음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 일부 언론사들은 인간의 ‘자기보존’의 마음을 증폭시켜 ‘타자공감’의 마음을 왜소하게 만든다. 이것이 일부 언론사들이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누군가 우리의 상처(고통)를 알아주면 위로를 받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는 반만 옳은 이야기다. 만약 누군가 우리의 상처(고통)를 과도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준다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유해함이다. 그 유해함은 무엇인가? 피해의식(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과 그로 인해 발생한 자기연민이다.
일부 언론이 특정 계층의 상처를 반복적이고 과도하게 위로할 때 ‘자기보존’의 욕망만이 난무하게 되고 ‘타자공감’은 현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과정 아래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은 촉발, 확대 재생산된다. 일부 남성들은 상처받은 여성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외면하고 적대시하곤 한다. 이는 그 남성들만의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집요하게 피해의식을 야기한 일부 언론의 결코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
언론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확대 재생산하는가?
젠더 갈등만 그렇겠는가? 세대 갈등과 빈부 갈등도 마찬가지다. 일부 언론은 자신의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노골적으로 자극한다. 20대의 지지가 필요하다면, 20대의 상처와 아픔을 유난히 크게 조명한다. 기성세대가 누렸던 사회적 이익(고도성장의 시대, 높은 취업률, 낮은 집값. 장기근속…)을 부각하는 동시에 20대가 처해 있는 사회적 불이익(저성장의 시대, 낮은 취업률, 높은 집값, 저임금…)을 부각한다. 이때 20대들의 마음에는 피해의식이 촉발되고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6, 70대의 지지가 필요하다면 그들의 상처를 유난히 크게 조명한다. 전후戰後에 겪어야만 했던 정서적 상실감과 절대적 빈곤, 군부 독재의 폭력, 젊은 세대 위주의 사회 문화에 따른 소외감 등등 6, 70대가 겪은 상처와 아픔을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부각할 때 그네들의 마음에서도 저마다의 피해의식이 촉발되고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세대 갈등은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일부 언론은 특정한 집단의 피해의식을 증폭시킴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빈부 갈등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이들의 지지가 필요할 때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와 아픔(긴 노동 시간, 열악한 노동 환경, 공공교통 불편, 저임금 문제…)을 유난히 크게 조명한다. 반대로 부유한 이들의 지지가 필요할 때는 그들의 상처와 아픔(각종 세금 문제, 부동산 문제, 인건비 상승 문제 등 각종 사업체 운영 문제…)을 유난히 크게 조명한다. 이때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대로, 부유한 이들은 부유한 이들대로 피해의식이 촉발되고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빈부 갈등이 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언론이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은 대단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우리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려고 한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반복해서 말한다. “너도 돈 없잖아. 너도 힘들게 살고 있잖아. 너 돈 없었을 때 누가 도와줬어? 그때 얼마나 비참했는지 까먹은 거야?”
과도하게 반복되는 친구의 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비범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그래, 나도 지금 힘들잖아.’). 심지어 추위에 떨고 있는 이에게 기묘한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나는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데, 너는 뻔뻔하게 구걸해서 돈을 벌다고?’). 이것이 일부 언론사의 피해의식 촉발‧확대 재생산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