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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과 언론 II

언론의 본령

언론의 본령


 물론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하는 일부 언론사들이 쏟아낸 기사들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요즘 일부 언론사들은 종종 ‘거짓’ 기사를 낸다.) 그 모든 기사들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언론의 본령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에 있다. ‘사실’(A가 B를 때렸다)은 ‘진실’(A는 가해자다)이 아니다. ‘사실’은 ‘진실’의 토대가 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실’들(B가 칼을 들고 A를 쫒아왔다. A가 B를 때렸다.)을 추가, 삭제, 배치하느냐에 따라 ‘진실’(B는 가해자다)이 아닌 ‘거짓’(A는 가해자다)을 구성할 수도 있다.


 언론의 참된 역할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리는 데 있다. 언론사는 단지 파편적인 ‘사실’만을 알리는 기관이 아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실’들이 있는가? 참된 언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사실’들 중 유의미한 ‘사실’을 연결하고 배치해 ‘진실’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그런 측면에서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사는 언론의 본령에 반하는 언론사인 셈이다.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하는 일부 언론사들의 행태를 보라. 수많은 ‘사실’들 중 특정한 ‘사실’만을 취사선택하여 보도하거나 혹은 그 취사선택된 ‘사실’들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교묘한 방식으로 배치(편집)하여 보도한다. 그 사이에 ‘진실’을 드러내기는커녕 명백히 존재하는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이러한 언론의 폐단은 자본가의 상처와 고통의 ‘사실’만을 주로 보도하는 일부 보수 언론사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와 자본가(부자)가 있다. 노동자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부당 해고‧인격 모독‧과도한 업무…)을 당하는 것처럼, 부자(자본가)들 역시 그런 일(과도한 세금 징수‧집값 하락‧주가 하락…)을 당한다. 그 모든 일은 ‘사실’이다. ‘A 재벌이 세금을 과도하게 냈다.’ ‘강남 부동산이 폭락했다.’ ‘세계 경기 침체로 주가가 10% 하락했다.’ 이런 기사들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어떤 ‘진실’을 알릴 수 있을까?


 이런 ‘사실’들의 반복적 나열은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우리 시대의 진실이 무엇인가? 소수의 부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진실’인가? 그렇지 않다. 절대 다수인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진실’에 훨씬 더 가깝다. 특정한 언론사들이 일부 사실들을 연결해 피해의식을 증폭하려는 것은, 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당파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f(나의 마음x타자의 목소리)

 

 피해의식을 다루는 데 있어서 언론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은 ‘나의 마음’과 ‘타자의 목소리’라는 두 변수가 만들어내는 함수다. 이는 ‘피해의식=f(나의 마음x타자의 목소리)’로 도식화할 수 있다. 즉, ‘나의 마음’이 고요해지면(요동치면) 피해의식은 잠잠해진다(거세진다). 하지만 만약 ‘나의 마음’이 고요해지더라도 피해의식을 촉발하는 ‘타자의 목소리’가 커진다면 피해의식은 그만큼 거세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이 ‘타자의 목소리’에 상관없이 존재하려면 ‘나의 마음’이 0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의 마음’의 요동이 아무리 작아지더라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0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시선이 필요하다. ‘나’의 피해의식을 잘 들여다보는 시선과 우리의 피해의식을 촉발‧증폭하려는 타자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시선. 물론 전자가 선행되어야 후자가 가능하다. ‘나’의 피해의식을 아프게 성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피해의식을 잘 돌보지 못해, ‘나의 마음’이 요동친다면, ‘타자의 목소리’와 상관없이 피해의식은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전자(나의 마음)만큼 후자(타자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의 피해의식을 성찰해서 마음이 고요해지더라도, 피해의식을 촉발‧증폭하려는 ‘타자’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려는 시선이 없다면 ‘나’의 피해의식은 다시 요동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언론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만 하는 이유다. 언론을 비판적으로 읽지 못한다면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하기 어렵다. 언론은 매우 큰 ‘타자의 목소리’이니까 말이다.

      

 이는 비단 특정 언론사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우리 주변 사람들 중 우리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증폭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많던가. 그들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요동치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다. 피해의식은 ‘나의 마음’과 ‘타자의 목소리’라는 두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함수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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