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절대적 피해자인 세상
왜 우리 사회는 점점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둔감해지는가? 왜 점점 더 이기적인 삶이 횡행하는가?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 피해의식이 있다. 피해의식에 휩싸이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그렇게 절대적 피해자가 된 이들에게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불쌍하고 안쓰러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타인의 상처와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만 보고 있는 이들에게 타인의 상처와 아픔이 보일 리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가 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어서, 또 어떤 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또 어떤 이는 가난해서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가 피해의식이 될 때, 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을 절대적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처럼 만연한 피해의식은 만연한 절대적 피해자를 양산한다.
모두가 절대적인 피해자가 된 세상을 상상해보라. 모두가 자기 상처와 고통에 매몰되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안쓰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자신보다 더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거나 폭력적인 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삶만 불행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피해의식이 만연해질수록 공동체적 불행 역시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지옥으로 가는 문,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지옥의 문을 연다. 이는 피해의식이 절대적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가해자 역시 양산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강요나 폭력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어린 시절 어떤 강요나 폭력 때문에 받은 상처가 짙은 피해의식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누군가 자신에게 작은 의무(“보고서는 이번 주까지 마감해주세요.”)를 강요 하거나 혹은 작은 폭력(별일 아닌 일에 언성을 높이는 일) 행사하려 하면,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질 나쁜 절대적인 가해자로 여기게 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가해자가 피해의식이 짙은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가해자로 둔갑하는 경우는 흔하다. 만연한 피해의식은 만연한 절대적 가해자를 양산한다. 이는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가? 모두가 절대적인 가해자가 된 세상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거기에는 이해와 관용, 배려와 포용, 공감과 교감이 있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악랄하고 잔인한 이들에게 어떻게 이해와 관용, 배려와 포용, 공감과 교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모두 절대적인 가해자뿐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숨거나 싸우는 일밖에 없다.
절대적인 가해자와는 타협도 대화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힘이 없다면 그들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 숨어야 한다. 만약 힘이 있다면 그들과 싸워 그들을 말살해야 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드러나는 두 양상 아닌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과도하게 소극적이거나 과도하게 폭력적인 양상을 띤다. 피해의식의 과도한 소극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가해자를 피해서 밀실 안으로 숨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피해의식의 과도한 폭력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절대적 가해자를 말살하려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절대적 피해자도, 절대적 가해자도 없다
이 얼마나 끔찍한 세상인가? 모두가 허상의 절대적인 가해자와 아귀다툼을 벌이는 세상. 어디가 지옥인가? 자신을 절대적인 피해자로 여기고, 상대를 절대적인 가해자로 여기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어떤 인간적 가치도 피어날 수 없다. 인간들이 모여 살았던 어떤 시대와 공간에서든 늘 크고 작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피해의식이 있다. 인간의 마음 내밀한 곳에서 작동하는 피해의식은 인간사人間事에서 늘 갈등과 마찰, 분열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옥의 서막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삶의 진실을 보라. 세상에 절대적 피해자는 없다. 우리가 어떤 상처를 입었더라도, 우리보다 더 큰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피해의식이라는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라. 세상에 절대적 가해자는 없다. 누군가의 악의 없는 행동이 우리에게 상처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어떤 이가 잔악무도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의 삶의 맥락을 깊이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그 역시 누군가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절대적 피해자도 절대적 가해자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는 상대적 피해자와 상대적 가해자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상처는 누군가의 상처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상처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 피해자일 뿐이다.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이는 분명 가해자다. 하지만 그 역시 반드시 상대적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상대적 피해자인 동시에 상대적 가해자다
진짜 삶의 진실에 대해서 말하자. 세상에는 상대적 피해자와 상대적 가해자만이 존재한다. 동시에 이 둘은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 피해자인 동시에 상대적 가해자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우리는 분명 피해자다. 돈, 외모, 성, 학벌 등등에 의해 상처받은 상대적 피해자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피해자이기만 할까? 정직하게 우리네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며 살았던가?
우리는 모두 상대적 가해자다. 자신을 (상대적 혹은 절대적) 피해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이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상대적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의도적인 혹은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며 사는 것이 평범한 이들의 일상 아니던가. 세상에 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가 넘쳐나는 이유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는 크고 많게 인식하고, 누군가에게 준 상처는 작고 적게 인식하기 때문일 뿐이다.
피해의식은 얼마나 허망하고 끔찍한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지옥의 문을 닫고 인간다운 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가? 세상에 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는 없고, 오직 상대적 피해자와 상대적 가해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가 상대적 피해자인 동시에 상대적 가해자라는 삶의 진실을 깨달을 때이다. 이 삶의 진실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이 지혜를 깨닫고 이 지혜를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지옥의 문은 조금씩 닫히고 인간다운 세계의 문이 조금씩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