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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과 파시즘

파시즘은 무엇인가?

     

“돈 많은 인간들은 다 도둑놈들이야!”
“남자(여자)들 때문에 여자(남자)들만 피해보는 거야!”
“날씬하고 예쁜 것들은 사람들을 무시해!”


 이런 마음들은 모두 피해의식이다. 이런 피해의식은 유해하다. 이 유해함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의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이 만연한 사회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촉발될 가능성을 늘 품고 있다. 이는 파시즘, 즉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촉발한 사회적 현상이 잘 보여준다. 피해의식과 파시즘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파시즘fascism이 무엇인가? 이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묶음)’에서 온 조어이다. 이 ‘파쇼’는 라틴어 ‘파시스fascis’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나무 막대기 묶음에 도끼날이 결합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나무 막대기는 처벌을, 도끼는 처형을 의미한다. 이것이 파시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파시즘은 특정한 정치‧사회적 ‘묶음(결속‧단결)’을 구성하고, 그 묶음에서 제외된 이들을 처벌하고 처형함으로써 다시 그 묶음의 결속과 단결을 강화하는 일련의 이념 체계이다.



 독일의 나치즘(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이념)이 대표적인 파시즘이다. 히틀러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나치 당원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살육했다. 그 참혹한 비극의 바닥에는 나치즘(파시즘)이 있었다. 나치즘은 독일인(게르만족)을 하나의 정치‧사회적 ‘묶음(결속‧단결)’으로 구성하고, 그 ‘묶음’에서 제외된 이(유대인)들을 처벌하고 처형함으로써 다시 독일인을 하나로 결속시켰다. 

     

 파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무비판‧비합리‧폭력적인 ‘묶음(결속‧단결)’이다. 이 ‘묶음(결속‧단결)’이 나치들이 행한 참혹한 학살을 옳은 일 혹은 불가피한 일로 정당화해주었다. 이것이 나치 당원들이 큰 죄책감 없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런 파시즘의 바닥에는 피해의식이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다. 끔찍한 살육을 자행했던 파시즘과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피해의식을 연결하는 것은 과도한 억측이나 비약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피해의식은 파시즘의 씨앗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어떤 이들이 파시즘에 더 쉽게 휘말려 들어갈까? 달리 말해, 어떤 이들이 무비판‧비합리‧폭력적인 ‘묶음’ 속으로 더 잘 휩쓸려 들어갈까?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이다. 피해의식이 무엇인가?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즉, 피해의식이 심하다는 것은 겁을 먹어서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잠식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마음에 휩싸인 이들은 무리(묶음)를 지으려는 욕망이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다.

      

 겁을 먹은 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패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무리가 어떤 무리인지 비판적‧합리적으로 판단하지 않은(혹은 못한) 채로 그 무리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겁을 먹어 혼자서는 싸우지 못하는 아이가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려는 마음과 유사하다. 이처럼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매우 쉽게 무비판‧비합리‧폭력적인 ‘묶음’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는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한다. 

    

 독일은 왜 파시즘이라는 악령에 휩싸였던 걸까? 나치즘(파시즘)의 배경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피해의식이 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등의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게 되었다(“나만 재산을 잃었어!”). 그뿐만 아니라 독일은 전쟁 이후 전쟁의 책임을 지게 되어 막대한 손해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국가로 지정되었다(“나만 억울하게 피해보았어!”). 1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런 사회적 배경은 독일 사회의 집단적 피해의식이 되었다. 이것이 나치즘(파시즘)을 탄생시킨 주요한 원인이었다. 결국 나치즘(파시즘)을 촉발한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피해의식이었던 셈이다.


      

파시즘과 피해의식, 다양성을 제거하는 안경

 피해의식은 파시즘의 원인인 동시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이다. 다시 묻자. 파시즘이 무엇인가? 복잡하고 난해한 학술적 정의를 찾아볼 필요는 없다. 파시즘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다양한 면들을 제거하고 하나의 면만을 보는 일이다. 무비판‧비합리‧폭력적인 ‘묶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면들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의 기준만으로 그들을 구별하고 분류할 때 가능하다.   

   

 나치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을 오직 ‘유대인’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인종적 특징(유대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느 유대인은 제빵사이고, 슈베르트를 좋아하며, 종종 철학책을 읽고,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강아지를 키우고, 저녁에는 산책을 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가진 그 다양한 면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을 볼 때 파시즘은 시작된다.   


   

 애정을 담아 키우던 송아지를 죽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 송아지는 어미 소의 새끼이고, 햇볕과 풀을 좋아하며, 함께 지낸 친구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 송아지를 죽일 수 있는가? 그 다양한 면들을 모두 제거하고 송아지를 단지 ‘소고기’로만 보는 이다. 그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심지어 자랑스럽게 송아지를 살육할 수 있다. 그에게 송아지는 단지 ‘소고기’일 뿐이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파시즘의 작동원리다.     

  

 이런 파시즘의 작동 원리는 피해의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피해의식은 일종의 안경이다. 다양한 세상을 오직 두 가지로만 보게 만드는 안경. 돈(학벌‧젠더)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세상을 ‘돈(명문대‧남성)’과 ‘돈 아닌 것(비명문대‧여성)’으로만 본다. 피해의식에 휩싸일 때 우리는 눈앞에 있는 상대의 다양한 면들을 볼 수 없다. 단지 자신의 피해의식이 비추는 하나(돈‧학벌‧젠더)의 면만을 보게 된다. 이것이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 무분별한 폭력성이 쉽게 드러나는 이유다.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씨앗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타인을 향해 크고 작은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한다. 많은 개인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은 바로 이 때문에 벌어지게 된다. 파시즘은 멀리 있지 않다.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파시즘적 태도를 갖고 있다. 또한 피해의식이 심한 사회는 파시즘적 사태의 문턱에 와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 드러나 있는 사회적 갈등들을 생각해보라.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은 모두 파시즘적 갈등이며, 이런 갈등의 근본에는 모두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빈부 갈등은 왜 생기는가? 가난한 이들의 피해의식(“돈 많은 인간들은 다 도둑놈들이야!”)과 부유한 이들의 피해의식(“돈 없는 인간들은 남의 돈을 거저먹으려고 해!”)의 충돌 때문이다. 세대 갈등은 왜 생기는가? 신세대들의 피해의식(“우리만 억울하게 취업이 안 되는 세대야!”)과 구세대들의 피해의식(“우리만 억울하게 배고픈 시절을 보냈어!”)의 충돌 때문이다. 젠더 갈등은 왜 생기는가? 여성들의 피해의식(“남자들 때문에 우리만 억울하게 피해보고 있어!”)과 남성들의 피해의식(“여자들 때문에 우리만 억울하게 피해보고 있어!”)의 충돌 때문이다. 사회적 갈등은 결국 저마다의 피해의식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의 충돌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무비판‧비합리‧폭력적인 ‘묶음’으로 세력화될 때 파시즘적 사태로 비화된다. 물론 우리의 사회적 갈등이 역사상 최악의 파시즘(나치즘)만큼 참혹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리 사회의 피해의식의 강도나 세력화가 그들(나치)만큼 심각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이는 반대로 말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피해의식의 강도나 세력화가 어느 임계치를 넘어가게 되면 우리 사회 역시 거대한 ‘아우슈비츠’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섬뜩한 전망이기도 하다.     


파시즘적 갈등 너머 사회적 논쟁으로     


 파시즘 혹은 파시즘적 사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만큼 우리는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모습들을 더 많이 조망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파시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면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이들이 모인 사회에 파시즘적 갈등은 없다. 두 아이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옆집 제빵사를 어떻게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처한 파시즘적 갈등 역시 같은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등 우리 사회에는 파시즘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수많은 갈등들이 있다. 이런 갈등들은 돈‧학벌‧젠더에 관한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해나갈 때 해소할 수 있다.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한 사람을 ‘부자냐, 빈자냐’(‘명문대냐, 아니냐’‧‘남자냐, 여자냐’)라는 이분법으로 파악하지 않게 된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삶에 대해 고민하고, 반려견을 사랑하며,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에 설레고 이별에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의 그 다양한 면들을 모두 볼 수 있을 때, 어떻게 상대를 무참히 짓밟아야 할 적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한 사람의 다양한 면들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좋은 일도 아니다. 건강한 사회적 논쟁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런데 이 건강한 사회적 논쟁은 파시즘적 갈등을 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상대를 (무비판‧비합리‧폭력적인 ‘묶음’을 구성할) 동지로도, (어떤 경우에도 박멸해야 할) 적으로도 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상태, 즉 적과 동지의 구분을 넘을 때만 우리는 건강한 사회적 논쟁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피해의식의 성찰과 극복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과제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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