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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시선, 비평가의 시선

주인공의 시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극화dramatization하려는 경향이 있다. 비교적 잘 맞는 직장을 찾았을 뿐인데 “천직을 찾았다.”라고 말하고, 꽤 매력적인 이를 만났을 뿐인데 “운명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자신의 삶을 극화하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보다 조금 더 특별한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은 왜 생기는 것일까? 인간은 모두 ‘주인공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은 어느 영화 속의 주인공이다. 이는 낭만적인 비유가 아니다. 직장에는 사장과 직원이 있다. 이때 사장은 주인공이고 직원은 조연인가? 그것은 사장의 삶에서만 그럴 뿐이다. 직원 역시 자신의 삶에서는 주인공이다. 악당(사장)에 맞서 고난(직장 생활)을 헤쳐 나가고 있는 어느 영화의 주인공. 이처럼 어떤 사람이든 1인칭의 시점, 즉 ‘나’의 시선으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주인공이 ‘삶’이라는 무대에서 ‘타자’라는 조연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주인공의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주인공의 시선은 우리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두 가지 극화,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영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해피엔딩 영화와 새드엔딩 영화. 이는 삶을 극화하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내 삶은 결국 행복해질 거야!” 이것이 해피엔딩식 삶의 극화다. 반면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어!” 이는 새드엔딩식 삶의 극화다. 해피엔딩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긍정적이다. 이들은 닥쳐온 고난과 역경에 나름 잘 대처한다. 이들에게 그 고난과 역경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디딤돌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반면 새드엔딩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주인공이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을 겪다가 결국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영화처럼 자신의 삶을 극화한다. 이 새드엔딩식 주인공의 시선이 바로 피해의식의 마음 상태다. 피해의식에 빠져 있는 이들은 새드엔딩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극화한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상처받았고, 사람들은 그 상처에 대해 알아주기는커녕 더 큰 상처만 준다고 여긴다. 이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를 외치는 순정만화의 주인공과 같은 심정이다.



유아적 자기애의 폐해

     

 그렇다면 해피엔딩식 삶의 극화는 좋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해피엔딩식 삶의 극화는 삶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힘이 되기도 하지만(“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그것은 결국 유아적 자기애 속에서만 나오는 힘이다.(“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새드엔딩식 삶의 극화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이들은 극심한 피해의식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해피엔딩식이든 새드엔딩식이든,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것만으로는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어렵다. 

     

 매 순간 자신의 삶을 극화하기만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유아적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유아적 나르시시스트는 어떤 이들인가? 세상에 엄존하는 타자(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보지 않고 모든 대상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는 이들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자신만(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인정한 타자만) 중요하며 모든 일들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유아적 자기애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극화할 때 발생하는 마음이다.      


 이런 유아적 자기애는 작게는 이기심이 되고 크게는 정신착란이 된다.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이들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타자들이 자신(의 행복 혹은 불행)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심해지면 정신착란 증세를 겪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마음은 현실을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이기심과 정신착란(피해망상) 사이 어디쯤에 있는 마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상처와 고통, 슬픔과 불행을 짊어진 기구한 운명의 어느 영화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 확신하기에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나부터 챙기는 게 뭐가 문제야!”). 또한 이런 피해의식은 극화, 즉 사실이 아닌 상상으로 조작된 것이기에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해치려고 하고 있어”)  


 

비평가의 시선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인공의 시선’ 이외에 하나의 시선이 더 필요하다. 바로 ‘비평가의 시선’이다. 주인공의 시선이 주관적(1인칭) 시선이라면, 비평가의 시선은 객관적(3인칭) 시선이다. 영화를 한 편 본다고 해보자.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아 어느 가정으로 입양되어 온갖 상처와 고통을 겪는 ‘캔디’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는 두 가지 시선을 가질 수 있다.

 

 먼저 ‘캔디’에게 감정이입하여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지.” 지독한 불운에 순응하여 홀로 좌절했던 ‘내’가 바로 ‘캔디’가 되어 그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주인공의 시선’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제3자의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 ‘캔디’를 보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독한 불행 앞에 선 이들이 모두 캔디처럼 무력하게 순응하는 건 아니잖아. 힘들고 아프겠지만 자신의 불행에 맞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도 있는 거잖아.” 이처럼 감정이입된 ‘캔디’로부터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그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비평가의 시선’이다.  

   

 우리에게는 ‘주인공의 시선’만큼이나 ‘비평가의 시선’이 필요하다. ‘비평가의 시선’은 객관적이기에 때로 차갑고 날카롭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어느 영화 평론가가 한 영화를 차갑고 날카롭게 비평하듯, 우리도 자신의 삶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서사narrative에 과도하게 몰입하기 때문 아닌가? 자신이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야기에 과몰입하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 아닌가? 이제 피해의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겠다.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이 필요하다. ‘비평가의 시선’은 무엇인가? ‘그’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보는 일이다. 즉, 자신은 안전한 곳에 서서 누군가의 글과 작품을 평가하는 일이다. 이런 ‘비평가의 시선’은 피해의식을 극복하게 해주기는커녕 더 짙어지게 만든다. ‘호준’은 비평가의 시선을 갖고 있다. 그는 이별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 친구랑 헤어진 게 뭐가 힘드냐? 나는 지금 주식 떨어져서 힘들어 죽겠는데.” ‘호준’은 ‘그’의 상처와 고통을 ‘나’의 시선으로 본다. 이것이 ‘비평가의 시선’이며, 이로서 피해의식의 극복은 요원하다.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은 무엇인가? ‘나’의 서사를 ‘그’의 시선으로 보는 일이다. ‘호준’의 ‘나’의 서사는 무엇인가? “작년에 받은 보너스로 주식을 샀는데, 주식이 절반이나 떨어졌다.” 이 서사를 ‘나’와 아무 상관없는 ‘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쌀이 떨어진 사람도 많은데, 주식이 떨어진 게 뭐가 대수냐?” ‘호준’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이다. 이런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피해의식은 점점 옅어진다. 

     

 피해의식은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과도하게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자신의 서사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는 만큼 피해의식은 옅어질 수 있다.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은 한없이 주관적인 마음에 객관성을 보완해준다. 그래서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마치 바둑을 직접 둘 때보다 훈수를 둘 때 수가 더 잘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비평가의 시선’은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두는 일이고,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은 ‘나’의 바둑에 ‘남’처럼 훈수를 두는 일인 셈이다.


   

비평가의 시선 너머 확장된 주인공의 시선으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나’의 상처와 고통을 ‘그’의 시선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럴 수 있을 때, ‘나’의 상처와 고통은 유별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피해의식은 점점 옅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은 다시 ‘주인공의 시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주인공의 시선’은 ‘나’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확장된 주인공의 시선’이다.

   

 ‘확장된 주인공의 시선’은 무엇인가? ‘너=나’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보는 일이다.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연습이 되면 ‘그’가 아닌 ‘너’가 보인다. 그 ‘너’는 ‘나’ 아닌 ‘너’가 아니라 ‘너=나’다.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호준’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호준’은 ‘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연습을 했다. ‘호준’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주식하락)이 유별나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호준’은 온통 ‘그’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상처를 거리 둬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너’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준’은 사랑하는 ‘너’를 만나 결혼을 했다. ‘호준’은 ‘너’의 상처와 고통을 마치 ‘나’의 상처와 고통처럼 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너(아내)’의 아픔이 ‘나’의 아픔처럼 느껴진다. 즉, ‘나’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보던 ‘호준’은 이제 ‘너=나’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확장된 주인공의 시선’이다. ‘호준’의 확장된 시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애 너머, 자기 객관화 너머, 사랑으로 

    

 ‘호준’은 사랑하는 ‘너(아내)’를 통해, 다시 천사 같은 ‘너(아이)’를 만났다. ‘호준’의 주인공의 시선은 또 확장된다. ‘아내(너)=아이(너)=나’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호준’의 주인공의 시선은 여기서 확장을 멈출까? 그렇지 않다. ‘호준’은 이제 길거리에서 아장아장 걷는 수많은 ‘너’들마저 ‘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내(너)=아이(너)=길거리의 아이’(너)…=나’의 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 밖에 모르던 ‘호준’이 생면부지의 아이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세월호 집회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확장된 주인공의 시선’ 때문이었다.  


 피해의식의 극복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주인공의 시선(나르시시즘)→뒤집힌 비평가의 시선(자기 객관화)→확장된 주인공의 시선(사랑!)’ 이는 사실 한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과도 같다. 미숙한 ‘아이’는 나르시시즘(자기애)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서사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청년’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아내), 한 사람(자식), 한 사람(생면부지의 아이) 사랑의 대상을 확장해 나갈 때 ‘청년’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과정은 한 ‘아이’가 ‘청년’을 거쳐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과정과 다름없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성숙하고 싶은가? 먼저 ‘나’의 상처와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라.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아닌 ‘너’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만난 ‘너’를 ‘너=나’가 되어 사랑할 수 있다. 그때 다시 주인공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 그렇게 주인공의 시선이 충분히 확장되었을 때 우리는 피해의식이라는 지독한 사슬에서 벗어나 성숙한 한 인간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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