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폭력의 방아쇠, 약함의 긍정
선한 이들이 폭력적이 될 때
‘택민’은 상처받은 아이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여느 집이 그렇듯 부모는 언제나 짜증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택민’은 그런 부모에게 사랑은커녕 학대에 가까운 폭력을 당했다. 다행히 ‘택민’은 착한 어른이 되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가 보아도 ‘택민’은 폭력적이기는커녕 순수하고 선한 사람처럼 보였다.
‘택민’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택민’에게 다가와 그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다. ‘택민’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택민’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고, ‘택민’ 역시 늘 외로움을 느끼던 그녀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었다. 그렇게 둘은 점점 가까워졌고 몇 개월 동안 내연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더 이상 ‘택민’에게 연락을 하지도, ‘택민’의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그렇게 ‘택민’은 이유조차 알 길 없이 그녀와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택민’은 돌변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했던 순수하고 선한 ‘택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택민’은 낮이든 밤이든 하루에 몇십 통씩 전화를 하고 집 앞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어렵사리 그녀와 연락이 닿았을 때, ‘택민’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폭언과 욕설을 쏟아냈다. 순수하고 선한 ‘택민’을 알고 있던 이들이라면, ‘택민’의 그런 폭력적인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다. ‘택민’이라면 마지막까지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할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택민’은 왜 그런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을까? 그녀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남녀 사이에 그런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때 누구나 당황하고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이가 ‘택민’처럼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택민’의 폭력성은 어디서 왔을까? 피해의식이다. 어린 시절, 가난과 부모의 무관심과 폭력에 의한 상처들은 ‘택민’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그 피해의식은 ‘택민’의 폭력성에 불을 붙였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는데, 이제 너마저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거야!” 이것이 ‘택민’의 폭력성의 정체다.
피해의식은 폭력성을 띠는가?
피해의식은 항상 폭력성을 띠는가? 그렇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건 그 피해의식의 강도만큼의 폭력성이 나타난다. 즉, 옅은 피해의식은 약한 폭력성(짜증‧하소연‧험담…)을, 짙은 피해의식은 강한 폭력성(폭언‧욕설‧물리적 위해…)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피해의식-폭력성은 경향성의 문제일 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즉, 피해의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폭력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진권’은 고아원에서 자라 온갖 상처를 겪으며 어른이 되었다. 당연히 그는 피해의식이 있다. 그것도 짙디짙은 피해의식이 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상처만큼 그의 마음은 뒤틀려 있다. 그런 ‘진권’ 역시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몇 해를 사귄 연인이 짧은 편지만을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하지만 ‘진권’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진권’은 그녀를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하고, 또 세상을 원망하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자신의 삶으로 돌아왔다.
세상에는 ‘택민’만큼 상처받은 이들도, 그보다 더 큰 상처에 노출되었던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택민’과 같은 폭력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진권’처럼 더 짙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지만 폭력성을 나타내지 않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택민’과 ‘진권’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어떤 이의 피해의식은 무분별한 폭력이 되고, 어떤 이의 피해의식은 그 자신 안에서 해소되는가? 이 질문 안에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약한 이들이 악하고, 강한 이들이 선하다
피해의식은 타인을 향한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약함의 긍정이다. 삶의 오해를 하나 바로잡자. 세상 사람들이 흔히 받아들이는 도식이 있다. ‘약함=선함’, ‘강함=악함’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약한 이들이 선하고, 강한 이들이 악할 개연성이 크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삶의 진실은 정반대다. 약한 이들이 악하고, 강한 이들이 선할 개연성이 크다.
그렇다면 ‘약함=선함’, ‘강함=악함’이란 오해는 왜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약한 이들은 힘이 없기에 그들의 일반적인(흔한) 폭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약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폭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아이가 개미를 죽이는 폭력을 생각해보라.). 반면 강한 이들은 힘이 있기에 그들의 예외적인(드문) 폭력은 크게 드러난다. 심지어 강한 이들은 그 존재 자체의 힘 때문에 그들의 모든 행동이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덩치가 산만 한 남자의 걸음걸이는 그 자체로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던가.).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네 일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경제적‧정서적‧신체적으로 강할 때는 타인을 도와주려고 하지, 타인에게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무분별하고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게 될 때는 경제적‧정서적‧신체적으로 약해졌을 때이다. 강함은 배려의 근간이고, 약함은 폭력의 근간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무분별한 폭력의 방아쇠, 약함의 긍정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약한 존재들이다. 피해의식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피딱지와 같다. 닿기만 해도 쓰린 연약한 상처다. 그러니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정서적으로 연약한 상태일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택민’과 ‘진권’은 모두 약한 존재들이다. 즉, 둘 모두에게는 무분별한 폭력성이 잠재해 있다. 하지만 그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것은 연약함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연약함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택민’과 ‘진권’은 모두 연약하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택민’은 자신의 연약함을 긍정한다. “어쩌겠어. 상처받았으니 약할 수밖에.” 하지만 ‘진권’은 다르다. ‘진권’은 자신의 연약함을 긍정하지 않는다. “상처받았지만 약해지지 않을 테야.” 바로 이 차이가 피해의식이 폭력성으로 발현될지 말지를 결정짓는다. 약함의 긍정. 이것이 피해의식으로부터 폭력성을 끌어낸다. 피해의식의 폭력 중 최악의 폭력은 ‘약함’이 아니라 ‘약함의 긍정’으로부터 온다.
선한 얼굴 뒤의 악마
다시 ‘택민’과 ‘진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택민’은 어떻게 폭력적일 수 있었을까? 한때 사랑을 나누었던 이에게 어떻게 폭언과 욕설을 쏟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은 약한 존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지속적인 약함의 긍정에서 온다. 이는 비단 ‘택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피해의식으로 인해 무분별한 폭력을 쉽게 행사하는 이들이 있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식당 종업원들에게 폭언을 일삼는 이들. 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고졸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
이들은 모두 긴 시간 자신의 약함을 긍정해왔던 이들이다. 상처받은 자신은 약해도 좋은,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기수긍. 이것이 바로 약한 이들의 선한 얼굴 뒤에 있는 악마의 정체다. 약함을 긍정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선량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는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얼굴 뒤에 있는 악마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함을 긍정하는 이들은 언제나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로 무장하고 있다. 자신은 약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상처를 줄 리가 없다는 자기기만,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더라도 자신은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 이것이 약함을 긍정하는 이들이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다.
악에 받친 얼굴 뒤의 성숙함
그렇다면 ‘진권’은 어떻게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던 연인이 하루아침에 떠나갔는데 어떻게 그 분노를 참을 수 있었을까? ‘진권’은 한때 사랑했던 이에게 폭언과 욕설을 내뱉는 그런 못난 인간만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약함의 부정이다. 상처받았지만 더 이상 약해지지 않겠다는 자기선언. 이것이 바로 강해지려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얼굴 뒤에 있는 성숙함의 정체다.
‘진권’만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끊임없이 부정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선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악에 받친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며, 그것을 넘어서려는 일은 악을 써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그들의 얼굴이 어찌 선해 보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의 악에 받친 표정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발버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버둥치는 이들은 결코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약함을 긍정하지 말라
“강해져라!”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리한 요구다. 상처받은 기억에 잠식당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연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약함을 긍정하지 말라!” 이것은 정당한 요구다. 강해질 순 없어도, 약함을 긍정하지 않을 수는 있다. 무기력하게 자신의 약함을 긍정하지 않을 정도의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
강함과 약함은 조건과 상황의 문제일 수 있다.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던 아이는 몸도 마음도 강하고,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자랐던 아이는 몸도 마음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약함을 긍정할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는 오롯이 자신의 선택 문제다. 아무리 나쁜 상황과 조건 아래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왔다고 할지라도, 약함을 무기력하게 긍정해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악착같이 거부할 것인지는 언제나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과도하고 무분별한 폭력은 피해의식이 치닫는 최악의 결말이다. 이 최악의 결말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기력하게 자신의 약함을 긍정하지 말라. 악을 쓰며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라. 자신의 약함을 긍정하는 만큼 자신 안의 악마가 자란다.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라.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는 만큼 성숙함이 자란다. 약함의 부정! 이것이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