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시가 확신이 될 때
“내가 돈이 없어 보여서 저러는구나.” ‘한주’는 우울해졌다. 백화점과 식당 점원들이 유독 자신에게만 불친절하고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주’의 우울의 원인은 무엇인가? 자신의 가난인가? 아니면 그로 인한 점원들의 불친절과 무관심인가? 둘 모두 원인이 아니다. ‘한주’의 우울의 원인은 피해의식에 있다. 처음부터 다시 묻자. ‘한주’는 정말 가난한가? 점원들은 정말 ‘한주’에게 불친절하고 무관심했나? ‘한주’는 ‘그렇다’고 확신하겠지만, 사실 이 모든 일들은 ‘한주’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착시일 수 있다.
피해의식에 휩싸이면 자신과 자신의 주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한주’는 자신이 정말로 가난한지 아닌지 파악하지 못한다. 또한 점원들의 불친절과 무관심이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만약 점원들이 정말로 불친절하고 무관심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 못한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한주’는 그 모든 일(불친절‧무관심)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자신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즉각적으로 단정 지었을 뿐이다. ‘한주’의 우울은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발생한 감정이다.
피해의식,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한 결과
‘한주’는 어떻게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으면 된다. 피해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다. 가난 혹은 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을 생각해보자.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 역시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냉대‧불친절‧비난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때 이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까? 자신이 가난하거나 학벌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즉각적으로 해석한다. 피해의식이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것은 이 즉각적 해석이 대부분 오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즉각적 해석(오해)는 왜 발생했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정말 가난한지(학벌이 나쁜지), 가난하다면(학벌이 나쁘다면) 대체 얼마나 가난한지(나쁜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주’가 자신이 정말 가난한지 아닌지, 그리고 가난하다면 그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을 만큼의 가난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주’는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냉대‧불친절‧비난의 모든 원인을 그리 쉽게 가난으로 단정 짓지 못했을 테다. 자신보다 가난하지만 사람들의 불친절·비난·무관심을 겪지 않은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타자’의 여집합이다
왜 ‘한주’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하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온통 ‘나’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통 ‘나’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을 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한다. 의아하다. ‘나’에게 관심을 쏟으면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는 삶의 진실을 뒤집어 보는 오류에 불과하다.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를 통해서다. ‘너’를 통해 ‘나’를 알게 된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타자’의 여집합이다. 즉, ‘나’는 ‘타자’ 아닌 존재다. ‘나’는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너(타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나’의 키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를 통해서이다. ‘나’보다 키 큰 ‘너’ 혹은 ‘나’보다 키 작은 ‘너’를 통해서 ‘나’의 키를 알 수 있다. 그런 ‘너’라는 타자가 없다면 ‘나’의 키를 수치로 잴 수 있는 ‘줄자’라는 ‘타자’라도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추운 겨울에 라떼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지칠 때 홀로 음악을 듣고 싶고, 슬플 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나’를 언제 알게 되는가? 라떼를 마시고, 홀로 있고, 글을 쓰는 ‘나’를 볼 때인가?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지칠 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고, 슬플 때 신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너’를 알게 되었을 때다. 그때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처럼 ‘나’는 ‘나 아닌 존재(타자)’를 통해서만 확인된다. 무인도에서 태어난 이를 생각해보라. 그는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많이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자신의 키가 얼마인지, 성격은 어떤지, 취향은 어떤지,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나’는 오직 ‘너’로 인해서 파악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의식 과잉을 벗어나는 법
‘너’를 통해서 ‘나’를 보기! 이것이 피해의식을 벗어나는 근본적인 해법이다. 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바로 자의식 과잉이다. 자의식 과잉이 무엇인가? 온통 ‘나’에게만 관심이 쏠려 ‘너’를 볼 수 없는 마음 상태다. ‘너’를 보아야 ‘나’가 보이는데, 자의식 과잉은 ‘너’를 볼 수 없게 만들어서 ‘나’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이 자의식 과잉이라는 마음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어야 비로소 피해의식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극심한 자의식 과잉 상태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가 아닌 ‘너’를 보기가 어렵다. 이는 거창한 이론 없이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 피해(상처)를 받은 일은 많고 크게 기억한다. 반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해(상처) 준 일은 적고 작게 기억한다. 아니 그런 일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누구인가? 상처받은 ‘나’와 상처 준 ‘나’ 모두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상처받은 ‘나’와 상처 준 ‘나’를 동등하게 본다는 말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드물던가? 자의식 과잉 너머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것은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이 드물고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항상 ‘나’를 알려고 애를 써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서양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사자후를 남겼던 진짜 이유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균, 피해의식을 넘어설 수 있는 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의식 과잉을 넘을 것인가? 그 실마리가 ‘평균(통계)’에 있다. ‘평균(통계)’을 통해 자의식 과잉을 해소하는 틈을 낼 수 있다. 물론 사회 과학적인 ‘평균’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니 때로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루 평균 568.41명 사망!’ 이것이 한 사람의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슬픔에 대해 무엇을 말해준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차가운 통계적 ‘평균’도 나름의 쓸모가 있다. 차가운 ‘평균’은 때로 ‘너’를 통해 ‘나’를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평균은 ‘너(타자)’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평균(통계)은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이 오래된 전언은 당분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너 주변을 알라!” ‘평균’은 온통 ‘나’에게만 시선이 쏠려 있는 이들에게 ‘너’의 존재를 드러내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평균’을 통해 보이지 않는 ‘너’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나’가 아니라 ‘나’ 주변의 평균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다시 ‘한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한주’는 어떻게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것인가? 평균을 찾아보면 된다. ‘한주’는 돈이 없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관심과 불친절, 비난에 시달린다고 믿고 있다. 온통 자신의 피해의식 뿐인 ‘한주’에게 ‘너’가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그때 ‘한주’가 우리 사회의 연평균 소득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 ‘평균(통계)’을 통해 ‘한주’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그다지 가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평균(통계)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 속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평균’ 속에서 ‘나’의 위치를 찾아갈 때, 조금씩 ‘너’의 시선으로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피해의식은 조금씩 옅어질 수 있다.
‘너’를 볼 수 없다면, ‘평균’을 보라!
‘평균’은 ‘나’의 피해의식은 오직 ‘나’만 보고 있었기에 발생한 일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어린 시절 강도나 교통사고를 당해 피해의식이 생긴 이들이 있다. 이들은 밤길과 찻길을 과도하게 두려워한다. 이들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들 역시 평균의 힘을 빌리면 된다. 이들이 잠시 ‘나’의 상처에서 눈을 떼고 연평균 강도 사건 혹은 교통사고 발생률을 찾아보면 어떨까?
전체 인구수 대비 강도 사건 혹은 교통사고 발생률이 자신의 생각만큼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강도 사건 혹은 교통사고에 대한 ‘나’의 불안과 공포가 ‘나(의 상처)’만 보고 있느라 과도하게 비대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물론 ‘평균’을 알게 된다고 해서 피해의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평균’으로 피해의식을 해소할 틈은 마련할 수 있다. 그 틈 사이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파악할 수 있다면 피해의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차가운 칼로 요리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메스가 되어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평균 역시 그렇다. 차가운 ‘평균’은 사회적 현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너’를 드러낸다. 그렇게 ‘평균은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온통 ‘나’만 보고 있느라 ‘너’를 볼 수 없다면, 평균의 힘을 빌리는 것도 건강한 삶을 위한 훌륭한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