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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

피해의식, 자기 객관화의 결여

    

“매일 아픈 사람들 만나니까 나까지 우울해지는 것 같네.”
“그래도 너는 회사 안 다니잖아.”      


 ‘경은’은 화가 났다. ‘경은’은 직장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겪었던 상처와 고통이 그녀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이것이 ‘경은’이 의사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느닷없이 화를 낸 이유였다. 사장, 팀장 밑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환자들한테 선생님 소리 들으며 돈까지 잘 버는 친구가 힘들다는 이야기에 화가 났던 것이다. ‘경은’은 피해의식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피해의식은 자의식 과잉 혹은 자기 객관화의 결여에서 온다. ‘경은’은 왜 화가 났을까?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시선을 두느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은’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이다. 즉, 직장인으로서의 자신의 상처와 고통이 유독 크고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의사 친구의 하소연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려 짜증나고 화가 났던 것이다. ‘경은’이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간명하다. 자기 객관화에 이르러 자의식 과잉을 해소하면 된다.


      

객관과 주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객관화에 이를 수 있을까?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평균(통계)을 찾거나 사랑하거나. 평균으로 자기 객관화에 이를 수 없다면 이제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사랑. 이는 결코 로맨틱하거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은 어떻게 자기 객관화에 이르게 하는가? 먼저 ‘주관subjective’과 ‘객관objective’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보자.     

 

 ‘주관’과 ‘객관’은 무엇일까? 철학에서 ‘주관적’과 ‘객관적’은 각각 ‘subjective’와 ‘objective’로 번역한다. ‘subjective’는 ‘주인’(주체)을 뜻하는 ‘subject’에서 유래한 말이고, ‘objective’는 ‘대상’(객체)을 뜻하는 ‘object’에서 유래한 말이다. 쉽게 말해, ‘주관적’이라는 말은 ‘주인’의 관점을 의미하고, ‘객관적’이라는 말은 ‘대상’의 관점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주관’과 ‘객관’이 무엇인지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제 “주관적이다” 혹은 “객관적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누군가를 자신의 기분에 따라 들쭉날쭉하게 평가할 때 “주관적이다”라고 한다. 반면 누군가를 특정한 기준에 따라 냉정하고 엄격하게 평가할 때 “객관적이다”라고 한다. 이는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고 ‘객관’은 ‘대상’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상대를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평가할 수 있지만, ‘대상’(특정한 기준)은 언제나 상대를 냉정하고 엄격하게 평가하게 되니까 말이다.



인간의 보편적 조건: ‘나’에 대한 주관성, ‘너’에 대한 객관성

     

 우리는 ‘나’에 대해서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타인’에 대해서는 지극히 ‘객관적’이다. ‘나’와 ‘타인’이 모두 중요한 시험에서 좋지 못한 점수를 받았다고 해보자. 이때 우리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까? “어제 잠을 잘 못 잤고,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고, 옆에 앉은 아이가 자꾸 연필을 떨어뜨려서 시험을 망친 거야.” 이처럼 ‘주인’(나)의 관점으로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를 내린다.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까? “그게 네 실력이다.” 이 짧은 한마디면 끝이다. 즉, ‘타인’에 대해서는 ‘대상’(점수)의 관점으로 지극히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다.      


 ‘나에 대한 주관성’, ‘너에 대한 객관성’. 이것이 인간 내면의 보편적 조건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나’에 대해서는 주관적이고, ‘타자’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기 객관화에 이르기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인간이 이 보편적 조건을 넘어설 때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이 보편적 조건이 뒤집어질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바로 사랑할 때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객관’적이 되고 ‘너’(타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주관’적이 된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진수’는 무례하며 뚱뚱한 중소기업 직원이다. 그는 자신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쿨한 것으로, 살찐 것을 건장함으로, 좋은 직장에 취업하지 못한 것을 사회의 부조리 탓으로 여긴다. ‘진수’는 자신에 대해 지독히 ‘주관’적이다. 반대로 자신과 유사한 타인에 대해서는 지극히 ‘객관’적으로 진단 내린다. ‘넌 쿨한 게 아니라 그냥 배려가 없는 거야.’ ‘넌 건장한 게 아니라 그냥 살찐 거야.’ ‘네가 대기업을 못간 건 네가 능력이 없어서야.’ 


   

사랑의 조건: ‘나’에 대한 객관성, ‘너’에 대한 주관성

     

 그런 ‘진수’가 사랑에 빠졌다. 그는 계속 자신을 향한 주관성과 타인을 향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사랑할 때 인간 내면의 보편적 조건은 뒤집어진다. 즉, ‘나에 대한 객관성’과 ‘너에 대한 주관성’을 갖게 된다.      


 사랑에 빠진 ‘진수’를 살펴보자. ‘진수’는 자꾸만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인다. ‘나는 쿨한 것이 아니라 배려심이 없는 것 아닐까?’ ‘나는 건장한 것이 아니라 뚱뚱한 것 아닐까?’ ‘내가 그저 그런 회사를 다니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 탓이 아니라 나의 나태함과 무능력 때문 아닐까?’ 사랑에 빠진 ‘진수’ 자꾸만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돌아보게 된다. 이처럼 사랑에 빠지면 ‘대상’(그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진수’는 그녀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자꾸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수’는 사랑하는 ‘너’에 대해서는 한없이 ‘주관적’이게 된다. 그는 약속 시간에 매번 늦는 그녀를 보며 ‘차가 많이 막혔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어딜 가나 소심해서 할 말 못하는 그녀를 보며 ‘상대방을 섬세하게 배려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매번 취업에 떨어지는 그녀를 보며 ‘요즘 경기가 많이 어렵구나’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랑에 빠지면 ‘나’에 대해서는 지극히 ‘객관적’이 되고, ‘너’에 대해서는 지극히 ‘주관적’이 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피해의식의 조건 : ‘나’에 대한 과도한 객관성, ‘너’에 대한 과도한 주관성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피해의식은 자신에 대한 과도한 주관성, 타인에 대한 과도한 객관성으로 점철된 마음 상태다. 이런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나’에 대한 주관성, ‘너’에 대한 객관성)이 과도해질 때 발생하게 된다. 언제 이 인간의 보편적 조건은 과도해지는가? 바로 사랑하지 않을 때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에 대해서 더욱 주관적이 되고, ‘너’에 대해서 더욱 객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사랑할 때만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역전시켜 ‘나’에 대한 객관성과 ‘너’에 대한 주관성을 성립시킬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을 해본 이들이 피해의식이 현저히 옅은 이유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 객관화를 촉발하고, 이는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한다. 다시 ‘경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경은’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경은’의 피해의식은 어디서 왔는가? 직장 생활의 상처와 고통 때문인가? 아니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과도하게 ‘주관’적으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과도하게 ‘객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상처와 고통은 유독 크고 특별하다고 믿고, 타인의 상처와 고통은 작고 대수롭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은’이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때 ‘경은’은 ‘너’의 상처를 ‘주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머니를 보살피며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너의 삶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너도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직장생활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처럼 ‘경은’은 사랑하는 ‘너’의 상처와 고통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너’에 대한 주관성은 동시에 ‘나’에 대한 객관성이 된다. ‘내 삶은 그리 힘든 삶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경은’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너’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사랑하라!

    

 이제 ‘경은’의 피해의식은 현저히 옅어질 수밖에 없다. ‘경은’이 사랑하고 난 뒤에 다시 의사 친구를 만났다고 해보자. 그때도 친구의 힘든 이야기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날까? 그렇지 않을 테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경은’은 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의 무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때로 큰 상처를 받는 일인지 공감할 수 있다. 이제 '경은'은 친구에게 짜증과 분노가 아니라 진심어린 위로와 격려를 전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언제 옅어지는가?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할 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 쉽게 말한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라!” 이보다 무지하고 순진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주관성’, ‘너를 향한 객관성’이라는 보편적 조건 안에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인간 내면의 보편적 조건을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이 보편적 조건을 무시하려 했다면 순진한 것이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의 피해의식은 이미 모두 사라졌을 테다.

     

 우리는 언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가? 사랑할 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뒤집을 수 있다. ‘나를 향한 객관성’, ‘너를 향한 주관성’ 바로 이 뒤집힌 조건 속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 피해의식을 무력화시키는 작동 원리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라. 그때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 너머 자기 객관화에 이르고, 비로소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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