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철학과 불교

불교 철학을 시작하며

진정한 '철학'은 '불교'적이어야만 하고,
진정한 '불교'는 '철학'적이어야만 한다.


1.

 철학哲學.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지낸 지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힘껏 공부했고, 진지하게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칠수록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종교宗敎. 저의 철학에서 빠져 있었던 것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벌써 거부감이 드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철학은 ‘이성(학습)’을, 종교는 ‘믿음(수행)’을 상징하기에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종교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성(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허황된 존재를 향한 믿음(맹신)을 결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보다 반철학적인 일도 없으니까요.


 ‘종교’가 무엇일까요? ‘종교’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구의 ‘religion’이라는 단어를 번역하면서부터입니다. 즉, ‘religion’이라는 서구 단어가 유입되기 전까지 ‘종교’는 대중 일반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단어는 본래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바로 불교입니다. ‘종교’는 불교의 고유한 용어입니다.


 종교에는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의 두 가지가 있다종통이란 신비적 경험이며 설통은 논리적 설명이다그래서 종교에는 이 두 가지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종교宗敎’의 기원은 당나라 승려인의 실차난타가 번역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궁극’ 혹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Siddhānta’를 ‘종宗’으로, ‘가르침’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Deśanā’를 ‘교敎’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 불교 용어인 ‘종교’의 원뜻은 궁극적인 깨달음(진리)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religion’을 ‘종교’로 번역한 것은 상당히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 ‘Religare’으로 이는 ‘다시 묶다’는 뜻입니다. 즉, ‘religion’은 하나로 결속되어 있던 신과 인간이 어떤 잘못으로 분리되었다가 예수의 부활로 다시 묶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religion’는 종교 일반을 의미하기보다 기독교 자체를 의미하는 말인 셈입니다.


 ‘종교’의 그 어원적 뜻에 따른다면, 그것은 유일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  궁극적인 깨달음을 가르치려는 일이니까요. 바로 이것이 일반적인 종교와 불교가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며, 동시에 불교가 여느 종교들보다 더 인문주의적인 체계인 이유입니다. 일반적인 종교는 유일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잠재성과 주체성을 외면합니다. 반면 불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는 ‘종교’ 그 자체입니다. 즉, 불교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일반 대중에 가르치려는 체제 혹은 체계입니다. 불교가 유일신의 체계가 아닌, 무신론 혹은 다신론(성불!)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겁니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 신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이는 부처만의 독점적 위치가 아닙니다. 또한 불교는 부처의 그 독점적 위치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부처의 그 독점적 위치를 타파하고 우리 모두 부처가 되라(성불!)고 요구합니다.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 해탈에 이르러 부처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불교는 ‘종교’이기에, 불교는 인간의 잠재성과 주체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우리가 모두가 부처(신!)에 이르는 길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이며, 불교가 그 어떤 철학 이론보다 더 인문주의적인 이론인 이유입니다. 인간의 잠재성과 주체성을 긍정하며 저마다 삶의 진실에 이르러 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불국토!)을 꿈꾸는 이론보다 더 인문주의적인 이론이 또 어디 있을까요? 



2.

 불교는 종교宗敎입니다. 하여, 불교는 모든 중생들에게 궁극적인 깨달음宗을 가르쳐敎 저마다 부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 쉽게 답할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서구의 철학자 중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청년) 비트겐슈타인조차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자신의 주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매듭지었었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 


 하지만 불교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탈(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인가?” 이것이 긴 시간 불교가 규명하려고 했던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저 공부를 많이 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저 더 열심히 믿으면 될까요? 모두 답이 아닐 겁니다. 평생 공부만 했던 교수나 혹은 평생 교회를 다녔던 교인이 해탈은커녕 더 큰 번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 흔하지 않나요? 


 지식과 깨달음은 다릅니다. 지식은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깨달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작은 깨달음이 그럴진데, 궁극적인 깨달음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말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말할 수 없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기에 가르칠 수 없습니다. 불교는 독특하며 또 위대한 이론입니다. 불교는 ‘말할 수 없는 것宗’을 가르치려는敎 불가능한 혹은 신비한 작업을 가능케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철학은 언어(이성·논리)로 궁극적인 깨달음(진리)을 전할 수 있다고 믿지요. 하지만 이는 유일신을 향한 믿음만큼이나 허황된 믿음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나 진정한 행복을 언어로 가르칠 수 있을까요? 언어(이성·논리)로 잘 설명하고 빈틈없이 논증하면 그것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겁니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것이기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여기에 불교(종교)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불교는 종교宗敎이기에 바로 이 지점, ‘말할 수 없는 것(궁극적인 깨달음)宗’을 ‘가르치려는敎’ 불가능한 혹은 신비한 일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까요? 그것은 진리(궁극적인 깨달음)-언어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과 그로 인한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바로 그 간극을 메워 긴장을 해소하는 유일한 학문-수행 체계일 겁니다. 


  불교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가르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체계일 겁니다. 일반적인 학문 체계(학교)는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칠 수 있을 뿐이고, 일반적인 수행 체계(명상)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뿐 그것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부처의 깨달음은 오직 부처의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언어(논리)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고통받는 중생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그저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부처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려고 불교라는 종교를 기초 세웠던 겁니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배운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3.

 그렇다면 불교는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려 했을까요? 불교는 언어로 언어의 길을 끊어서 진리에 도달하는 법을 알려주려 합니다. 언어도단! 불립문자! 바로 여기에 불교와 철학 차이, 혹은 철학의 맹점이 있습니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 뿐,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불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불교에는 ‘믿음’이 있고, 철학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에 거부감을 갖는 시대입니다. 저마다 똑똑하다고 믿는 시대이니 당연한 일일 겁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은 왜 중요할까요? ‘믿음’이 있을 때라야, ‘언어도단’을 헛소리로 여기지 않고 ‘불립문자’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이런 특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서양 철학자 중 한 명이 장년의 비트겐슈타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내가 두려워하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수열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한다면나는 신속히확신을 가지고 행위를 할 것이며근거들의 결여는 나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누구나 자신만의 ‘수열’(삶의 규칙)이 있습니다. 이 수열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수열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 사람이 ‘1,2,3,4…’라는 ‘수열’을 믿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에게 ‘1,3,5,7,9…’라는 수열, ‘2,4,6,8,10…’라는 수열은 헛소리인 ‘언어도단’일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매우 두려운, 즉 온 마음을 다해 믿는 경외의 대상(연인·스승·선각자…)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경외의 대상이 그에게 ‘2,4,8,16,32,64,128…’라는 수열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고 해봅시다.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속히, 확신을 가지고 그 행위를 할 겁니다. 경외의 대상 앞에서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요.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그는 자신의 조악한 수열(n+1)의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아니 삶의 진실에 가까운 수열(2ⁿ)을 깨닫게 될 겁니다.


 철학에는 ‘믿음’이 필요 없지만, ‘종교’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불교 역시 여타의 종교들처럼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일 겁니다. 하지만 불교 공부를 시작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요구하는 ‘믿음’은 유일신 향한 ‘믿음’, 즉 그 자체가 목적인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불교에서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깨달음과 수행 때문입니다. ‘믿음’은 진리-언어 사이 긴장을 일거에 해소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도구이며, 그 깨달음 이후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지난한 수행을 기쁜 마음으로 지속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즉, 불교의 ‘믿음’은 불가능한 혹은 신비한 시도(해탈!)에 가닿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일상’은 ‘삶’에 짓눌려 ‘앎’을 외면합니다. ‘철학’은 ‘앎’을 강조하느라 ‘삶’을 외면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더 정확히는 '불교'입니다. 불교 안에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쳐서’ 삶(진리)과 앎(언어)의 긴장을 해소해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습니다. 철학의 궁극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일일 겁니다. 그러니 진정한 '철학'은 '종교(불교)'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종교(불교)'의 궁극은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진리(말할 수 없는 것)을 중생들에게 알리는 일일 겁니다. 그러니 진정한 '종교'는 역시 '철학'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은 종교(불교), 즉 진정한 철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철학수업] 선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