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궁극의 자기집착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여자도 남자를 좋아했고, 남자도 여자를 좋아했다. 그 둘의 마음은 같은 것이었을까? 마음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했기에 온 마음으로 ‘너’를 담았다. 여자는 자신의 생일 선물을 고심해야 했다. 남자보다 자신의 생일이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남자는 늘 돈 걱정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의 생일이지만, 남자가 원했던 선물을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남자 역시 여자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늘 그렇게 ‘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너’를 좋아했다.        


 남자는 어땠을까? 남자 역시 여자를 좋아했다.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남자는 여자를 만날 때면 늘 자신의 불안과 불만을 늘어놓았다. 여자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가 좋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여자에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선물을 사주지 않아도 된다는 여자의 말에 내심 서운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남자 역시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은 여자의 마음과 다르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항상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너와 함께 있어도 외로워” 어느 날, 지쳐버린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후회하며 말했다. “미안해. 나도 이런 내가 싫어.” 여자의 외로움은 절망이 되었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늘 자신만을 생각하는 남자에게 온 마음이 베여버려 피 흘리며 아프다고 외친 비명.  “미안해, 나도 이런 내가 싫어” 이 말은 남자만 몰았을 뿐, 여자의 비명조차 베어 베어 버리는 일이었다. 남자는 끝끝내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외로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단점을 보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으니까.

      

 이것은 궁극의 자기집착이다. ‘너’를 생각하지만, 그조차도 이미 ‘나’만 생각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너'를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궁극의 자기집착이다. 이는 결코 이기심이 아니다. 이기심이라면 사태는 훨씬 쉬울지도 모른다. 명료한 이기심은 결코 자신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의 자기집착은 뿌리 깊은, 그래서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자기기만이다. 남자는 알고 있을까? 수없이 ‘너’를 생각했던 모든 마음이 사실 모두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남자는 언제 즈음 알게 될까? ‘너’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다는 믿음이 사실은 지독한 자기 집착의 마음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너를 생각한다.” 쉽게 말하지 말라. ‘너’를 생각하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나’를 생각하는 마음일 수 있다. “너는 중요한 사람이다” 말하지 말라. '너'를 중히 여기는 그 마음 자체가 이니 '나'를 중히 여기는 마음일 수 있다. “너를 사랑한다” 쉽게 말하지 말라. '너'를 사랑하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나'를 사랑하는 마음일 수 있다. 잊지 말라. ‘너’를 생각하는, ‘너’를 중히 여기는,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집요하고도 끈질긴 자기집착을 넘을 때만 겨우 붙들 수 있는 마음이다.        


 누가 사랑을 '나'를 버리는 길이라 하는가? '나'를 버린 곳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누가 사랑을 '너'에게 가는 길이라 하는가? '나'를 업고 '너'에게 가는 길은 사랑이라는 외피를 두른 자기집착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은 '나'를 버리고 '너'에게 가는 일이다. 그 길 끝에 진짜 '나'와 '너'와 '사랑'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사이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