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담배와 우울증

둘 다,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멍하니 한동안 바라봤다. 뿌옇게 내뿜는 연기 너머로 그의 고민과 회한, 상처, 아픔이 느껴졌다. 그 모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에게도 애써 눌러두고 있었던 고민, 회한, 상처, 아픔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일까? 알고 있다. 이 느낌. 우울증. 한 동안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질지 몰랐던 그 느낌. 한 없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느낌, 그렇게 내려앉을수록 세상이 두려워 보이는 느낌. 내게 우울증은 그런 느낌으로 찾아왔다.


 담배와 우울증은 닮아 있다. 담배를 끊는 사람은 없다. 담배 맛을 한 번 본 사람 중 담배를 끊는 사람은 없다. 그저 누군가는 조금 짧게 누군가는 조금 오래,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참으면서 사는 것일 뿐이다.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끊을 수 없다. 완치가 없다. 우울증에 한 번 빠져본 사람은 그 느낌을 끊을 수 없다. 우울증은 어느 순간 확 덮쳐 들어온다. 누군가는 조금 짧게, 누군가는 조금 오래,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견디며 사는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몸과 정신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울증은 정신의 문제이지만, 우울증에 걸려본 사람은 안다. 우울증이 덮쳐 왔을 때 몸도 아프다는 걸. 철학을 공부하면서 삶 굽이굽이에서 만나게 되었던 고민을 피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제 우울증을 참고 견딜 수 있을 정도로는 성숙해졌으니까 말이다. 처음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현관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은 꾸역꾸역 새벽에 문을 열고 세상으로 다시 나올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으니 말이다. “살자. 살아보자. 버텨보자. 견뎌보자. 삶은 그런 것이니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여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한때는 저주처럼 들러붙은 우울증을 떼어내서 나와 가장 먼 곳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친구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겠다.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만 나의 모습이진 않을 게다. 어둡고 부정적이며 절망적인 모습도 나의 모습이다. 어쩌랴.


 담배를 죽을 때까지 참으며 살듯이, 우울증도 그저 내 삶의 일부라 여기고 죽을 때까지 버티며 견디며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 “살자. 살아보자. 버텨보자. 견뎌보자. 삶은 그런 것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일과 돈에 관한 생활철학' 수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