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만 ‘기억’된다.
베르그손의 철학에서 ‘기억’은 아주 중요하고, 그 중요도만큼 난해한 개념이에요. ‘기억’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흔히 우리가 ‘기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기억’이거나 ‘너’의 ‘기억’을 의미하잖아요. 즉, ‘기억’을 ‘개인적 정신’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베르그손의 ‘기억’은 이런 ‘개인적 정신’뿐만 아니라 ‘우주적 정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쉽게 말해, ‘나’의 기억도 있지만, 우주(세계)의 기억도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개인적 정신’으로서의 ‘기억’에 방점을 두고 설명할게요. ‘나’의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우주적 지속’의 일부가 ‘나’의 신체라는 ‘상’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이 바로 ‘기억’이에요. 여기서 ‘우주적 지속’이란 말이 난해하죠. 이는 세계 전체로서의 공간과 시간을 의미해요. 즉 ‘우주적 지속’은 무한한 공간에서 무한히 흘러가고 있는 시간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제 ‘나’의 ‘기억’(개인적 정신)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죠.
‘나’는 세계(공간과 시간 전체)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죠. 우리는 모두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서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100만 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할 수 없죠. 우리는 오직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만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잖아요. 우리는 오직 그 제한된 공간과 시간, 즉 ‘우주적 지속’의 일부 속에서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그것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존재죠. 즉, 한 개인의 ‘기억’이라는 것은 ‘우주적 지속’의 일부(‘지금’ ‘여기서’)가 그의 신체라는 ‘상’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이죠.
‘기억’은 ‘상’과 ‘상’의 결합이다.
‘기억’은 ‘상(진동)’과 ‘상(진동)’의 결합이에요. ‘나’라는 ‘상’과 세계라는 ‘상’의 결합이 바로 ‘기억’이죠. 세계(시공간)라는 ‘상’이 있잖아요. 이는 진동이죠.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모든 물질은 다 떨리고 있어요. 인간이 가진 지각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그걸 못 보는 것뿐이죠. 현대 과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이 이를 증명해 주잖아요. 연필은 고정된 채로 있는 것 같지만, 이는 우리가 거시 세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일 뿐이에요. 양자와 같은 미세 입자가 존재하는 미시 세계에서는 연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끊임없이 떨리고 있는 상태예요.
‘나’의 ‘기억’이라는 것은, ‘내’ 신체의 진동(상)과 타자(세계)의 진동(상)이 중첩되어 만들어지는 독특한 진동(상)인 거예요. 마치 피아노의 선율(진동)과 첼로의 선율이 중첩되어 만들어지는 음악(진동) 같은 거죠. 이것이 같은 타자를 만나도 사람마다 ‘기억’이 다른 이유죠. 똑같은 물체를 봤다고 하더라도, 몇 년 뒤에 A는 그것을 흰색으로, B는 회색으로 기억하기도 하죠. 이는 그 물체의 진동(상)이 같다고 하더라도, 각자 신체의 진동(상)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죠. 동일한 물체(진동)라 하더라도, A, B의 신체 진동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중첩된 진동(기억)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죠.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많죠. 같은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도, 유쾌하고 활기찬 상태(진동)에서 그 영화(진동)를 봤던 이와 절망적이고 우울한 상태(진동)에서 그 영화가 봤던 이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 둘이 ‘기억’하는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일 거예요. 오래된 친구나 가족들끼리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해서 난감해하거나 때로 다투기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죠. ‘기억’이라는 것은 세계의 진동(상)과 개인의 진동(상)이 중첩되어 만들어지는 개별적인(유일한) 진동(상)이니까요.
‘기억’은 ‘지속’이다.
‘기억’은 ‘상(나)’과 ‘상(세계)’의 결합이죠. 이 결합이 어떻게 ‘기억’으로 자리 잡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이 있어요. 가로로 그어진 곡선이 시간 축이고, 세로의 축이 공간 축이에요. 세계는 무한히 많은 공간(세로축)이 시간 속(가로축)에서 흘러가고 있죠. (그림의 공간 축을 더 정확하게 그리면 떨리는 진동 모양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직선으로 표현한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공간도 떨리는 진동의 모양으로 그려주어야 해요.)
이때 우리는 시간 축을 따라 세계의 모든 삼라만상(공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죠. ‘나’의 신체가 특정한 공간에 서 있을 때만 ‘기억’으로 포착되죠. ‘나’의 신체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a, b, c, d라는 점에서 만나게 되죠. 바로 이 a, b, c, d가 우리의 ‘기억’인 것이죠. 우리가 a, b, c, d를 만나면서(경험하면서) 지나가는 이 시간 축은 끝없는 흐름이겠죠. 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축이 바로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이에요. a, b, c, d라는 각각의 음을 듣지만, 그것들이 개별 음이 아닌 음악으로 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지속’의 원리로 형성됩니다. 우리가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점유할 때, 그 순간은 정지된 표상으로 ‘지각’되죠. 쉽게 말해, 우리가 학교, 직장, 영화관 등 어디 서 있을 때, 그 순간들은 모두 정지된 순간으로 지각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지각’들이 모인 ‘기억’은 그렇지 않죠. ‘기억’은 흐름(지속)으로 기억되잖아요. 만화책을 한 권 읽었다고 해봐요. 우리는 ‘그림’들을 본 거잖아요. 하지만 그 만화책이 ‘그림’(정지된 표상)으로 ‘기억’되나요? 그렇지 않죠. 우리의 머릿속에는 ‘애니메이션’(유동적 표상) 들어가 있죠. 바로 이것이 세계라는 ‘상’과 ‘나’라는 ‘상’의 결합이 ‘기억’으로 잡는 원리예요.
기억=기억+지각
‘기억’이 무엇일까요? 다시 도표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를 본다고 했을 때, 그것은 a죠. 그리고 그것은 ‘순수 기억’이 되겠죠. 즉, a는 ‘순수 지각’이자 ‘순수 기억’의 대상이죠. 그리고 그다음에 b를 보게 되죠. 바로 이것이 최초의 ‘기억’이에요. 즉 ‘a-b’의 ‘지속’이 최초의 ‘기억’이에요. ‘순수 지각’과 ‘순수 기억’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기억’은 ‘지속’인데, ‘지속’이 가능하려면 최소 둘 이상의 것들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죠. 하나의 음은 음악이라고 할 수 없고, 음악이 되려면 최소한 두 음이 이어져야만 가능한 것처럼 말이죠.
만화책을 보는데 첫 장면, 한 컷만 보고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되지 않잖아요. 최소한 애니메이션(지속)으로 ‘기억’되려고 하면 최소한 두 번째 컷이 나와야 하잖아요. 예를 들면, 주인공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장면이 있고, 다음 장면으로 상대방이 주먹을 맞아 코피가 나는 장면이 있다고 해봐요. 최소한 이 두 장면이 있어야 악당이 주먹을 맞고 고개가 돌아가는 ‘지속’적인 흐름으로 ‘기억’되잖아요. ‘기억’은 이런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 형성됩니다.
엄밀히 말해, ‘기억=기억+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죠. ‘a-b’라는 최초의 ‘기억’에 다시 c를 ‘지각’해서 a-b-c(기억′)가 기억되고, 다시 d를 ‘지각’해서 a-b-c-d(기억′′)가 ‘기억’되는 거잖아요.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a-b-c-d-e-f……(기억′′′′′′)으로 나아가죠. ‘기억(a-b-c-d-e-f)’은 ‘기억(a-b-c-d-e)’과 ‘지각(f)’이 반복되는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 형성됩니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세계의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지각)는 정지된 상태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기억도 ‘그림’처럼 ‘기억’되지 않아요. 앞뒤로 붙은 ‘영상’(지속)처럼 기억돼요.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여기서 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있죠. 그 영상(기억)이 모두 다 편집된 거라는 사실이에요. 우리의 ‘기억’은 모두 편집된 ‘기억’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정지된 표상(그림)만을 바탕으로 ‘기억’(영상)을 구성하기 때문이에요.
첫 장면에서 주인공이 주먹을 휘두르고, 다음 장면에서 악당이 코피를 흘리고 있다고 해 봐요. 그 두 컷을 보고 우리는 주인공이 악당을 때리는 영상을 ‘기억’하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죠. 첫 장면과 두 번째 장면 사이를 우리의 상상으로 편집한 거잖아요. 실제로는 주인공의 주먹을 피하려다 벽에 부딪혀서 코피가 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기억’이란 가장 개연성이 높은 흐름일 뿐인 거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발표하는 상황이 있었다고 해봐요. 발표 도중 사람들이 웃으면 어떤 이는 자신의 발표가 재미있어서 웃었다고 기억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기억할 수도 있겠죠. 이는 각자 가진 ‘기억’에 의해 현재 지각(웃음)이 더해져 발생한 해석의 차이인 거죠. 이처럼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기보다 기존의 ‘기억’에 특정한 ‘지각’이 더해지면 발생하는 자의적인(물론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개연성이 높은)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