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데아를 표방할 뿐, ‘사랑’은 언제나 ‘현실적 사랑'일 뿐이다. 만약 이것이 ‘사랑’의 현실적 조건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자유’를 꺾으려는 마음 역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실적 사랑'에는 언제나 의존과 집착, 소유욕, 그리고 그것들이 추동하는 배타성이 어느 정도 도사리고 있으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의 날개를 꺾는지도 모른 채 꺾는 이들이 얼마나 흔하더냐.
스피노자의 말은 조금 수정되어야 한다. ‘사랑’을 교살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다. ‘사랑’을 교살하는 것은 ‘현실적 사랑’이다. '현실적 사랑'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의존, 집착, 소유욕, 배타성 때문이다. 그것들이 ‘증오’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그래서 ‘현실적 사랑’ 속에 있는 이들은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증오’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고, 그래서 그 누군가와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그저 ‘현실적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이데아적 사랑을 찾아 헤매야 할까? 둘 모두 강박적인 극단성일 뿐이다. ‘사랑’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에게 집착하고, ‘너’를 소유하고 싶고, 그 때문에 ‘너’와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은 필연적이다. (의존의 문제는 그 이전에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다.)
이 필연적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필연적 욕망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개 숙여서도 안 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견뎌 보겠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넘어 ‘우리’ 속에서 ‘너’를 사랑하려 애써 보겠다.” 그 지독한 고통을 견뎌내려 애써야 한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사랑'하려 할 때, 음습하고 질퍽한 늪 같은 사랑이 아닌 햇살과 바람 가득한 바다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 오직 고통만이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법이다.
집착과 소유욕, 배타성의 수긍과 그것의 거부! 그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들만 사랑에 가닿게 된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물속을, 나무 위를, 하늘을 계속 여행해라. 그렇게 '너'의 ‘자유’를 분출해라. 언젠가 만나게 될 테다. 땀과 눈물로 그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을. 만약 그 둘이 만나게 된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알아볼 테다. ‘사랑’에 가닿으려 고통스럽게 흘렸던 땀과 눈물은 온몸에 문신처럼 각인되는 법이니까.
-다시, 사랑하려는 제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