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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식

‘권위 의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에게 ‘권위 의식’이 있는가? 이제 나도 고민을 해볼 나이가 되었다. 진보적으로 살려고 진심으로 애를 써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게 지나친 ‘권위 의식’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꼰대가 되기 마련이니까.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당신은 아직 삶을 모릅니다. 지금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게 의미가 없어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들은 이런 나의 말에 불쾌와 불편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말한다. “당신은 지나치게 권위적이에요.” 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려는 나의 말에,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럼 너는 삶을 아냐?”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네가 삶을 안다고 하더라도,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전자는 ‘자격’을 문제 삼는 것이고, 후자는 ‘표현’을 문제 삼는 것이다. ‘자격’이든, ‘표현’이든, 나의 말을 ‘권위 의식’의 발로라고 보는 것은 동일하다.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는 내게 그럴만한 ‘권위’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권위’와 거리가 멀다. 내게는 객관적인 ‘권위(학위·자격증)’도 없고, 주관적인 ‘권위(명예)’를 가질 수 있을 만큼 대중 친화적이지도 않다. 나는 야인으로 철학을 시작했고, 철학을 끝낼 때도 야인으로 끝내고 싶다. 나는 여전히 ‘권위’와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나는 왜 ‘권위주의’적으로 들릴 말들을 하는가? ‘피로’와 ‘대화’ 때문이다.


나는 ‘피로’하다. 누군가 자신 삶의 문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오면 나름으로 답을 해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 대화는 헛돌게 된다. 삶이 없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묻는다. ‘삶’ 대신 ‘말’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혹은 살아내는 대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헛도는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질 때, 시지프스의 ‘피로’가 나를 짓누른다. 그 피로함 때문에 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다. “그만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피로' 때문일 뿐이다. 이는 나의 한계이고, 부족일 순 있어도, 내게 상대를 무시하거나 모욕줄 '권위'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권위주의’적으로 들릴 말을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대화’하고 싶다. 진정한 대화. 이것이 내가 ‘권위주의’적으로 들릴 말들을 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진정한 대화는 ‘말’과 ‘말’이 만나는 곳에 있지 않다. ‘삶’과 ‘삶’이 만나는 곳에 있다. “당신은 아직 삶을 모릅니다. 지금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게 의미가 없어요.” 나의 말은 언젠가 너와 ‘말’과 ‘말’이 아닌 ‘삶’과 ‘삶’이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은 좀처럼 상대에게 가닿지 못한다.


내게 ‘권위 의식’이 있다고 말했던 이들은 대체로 유약하거나 기만적인 이들이었다. 자신의 얕은 ‘삶’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쉬이 상처 입는 이들이 있다. 또 자신의 얕은 ‘삶’에도 불구하고 ‘말’들로 깊은 '삶'에 이를 수 있다거나, 자신의 얕은 ‘삶’을 외면 한 채, 깊은 ‘삶’에 이른 이들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전자는 약하고 후자는 기만적이다.


이들은 ‘권위 의식’이라는 그럴듯한 방패 뒤에 숨어 자신의 약함과 기만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이들은 모두 '권위'적이라고, 나와 동등하게 대화하려 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권위'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이들은 진정한 대화에 이를 수 없는 이들이고, 바로 그 때문에 ‘진정한 대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피로’를 주는 이들이다.


누군가에게 ‘권위 의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권위 의식’을 문제 삼기 전에, 자신에게 한 사람의 ‘피로’와 ‘애정’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지를 먼저 되돌아볼 일이다. 오직 자신의 유약함과 기만에 직면하고 그것을 넘은 이들만이 ‘권위 의식’ 너머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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