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다시 수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매번 선거철이 되면 또 헛된 희망을 품게 된다. 내가 원치 않는 정치인이 당선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정치인이 당선되면 막히고 뒤틀렸던 세상이 열리고 바로잡힐 것만 같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어떤 이가 권력의 중심이 되어도, 열린 세상, 바로잡힌 세상은 단 한 번도 도래한 적이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정치의 무용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중요하다. 정치가 무엇인가? ‘함께 사는 법’이다. 정치인을 선출한다는 것은 공동체적 자원의 배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이다. 바로 이 합의를 통해 함께 사는 법이 정해진다. 그러니 정치는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이가 대통령이 되는지에 따라 사회적 약자(극빈층·장애인·노동자)를 중심으로 함께 살 것인지, 사회적 강자(부유층·비장애인·자본가)를 중심으로 함께 살 것인지가 정해지니까.
하지만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정치는 ‘함께 사는 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함께 사는 법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는 ‘나’들의 진동일 뿐이다. ‘나’들이 무채색이라면, ‘함께 사는 법’을 아무리 덧칠을 해본들, ‘함께’는 결국 무채색의 변주일 수밖에 없다. 마치 한명 한명의 연주자들이 음을 어둡게 연주하면, 지휘자가 아무리 아름다운 곡을 아무리 아름답게 지휘한다고 해도, 전체 곡은 미묘하게 어두운 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진보적 정치가 사회가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정치를 추동했던 ‘나’들의 마음에 무채색 욕망이 드글거리고 있다면, 사회는 진보적 방향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유사 이래 민주주의 역사가 말해주는 삶의 진실 아니던가.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의 진보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진보성의 민낯은 부르주아(상인) 계급이 왕정(귀족) 계급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무채색의 욕망 아니었던가? '왕정' 계급을 타파하려던 진보적 정치가 가닿은 곳은 결국 '자본' 계급의 논리(상인의 귀족화!)였다.
진보적 정치인이 당선되었다고 사회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 정치인을 왜 선출했는가? 우리 사회에서 ‘유령’처럼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조금 더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서였는가? 아니면 알량한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내 월급, 내 가게 매상을 올리고 싶어서였는가? 후자의 ‘나’들이 뽑은 정치인은 결국 진보적 방향으로 사회를 퇴행시키는 역설에 갇힐 수밖에 없다. 오직 전자의 ‘나’들이 뽑은 대통령만이 사회를 진보시킬 테다. 전자의 '나'들만큼 사회는 진보할 테다.
87년 이후, 최악의 대통령의 망령에서 벗어났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와 달리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을 테다. ‘우리’의 욕망은 여전히 무채색이기 때문이다.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밭을 갈러 가야 할 시간이다. 글을 써야겠다.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무채색 욕망을 알록달록하게 빚어내기 위해서. 수업을 해야겠다. ‘너’의 무채색 욕망이 알록달록한 욕망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
알록달록한 '우리'가 모여서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운 선율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 열매를 맺을지 모를 땅에 다시 뿌리내릴 시간이다. 이것이 미력한 내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바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