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뜻대로 하소서” ‘사랑’은 무엇인가? ‘복종’이다. 무조건적 ‘복종’. 이는 자명하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 사람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곱창’이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이라고 한다면 ‘곱창’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이다. 그녀가 ‘고야’만이 진정한 화가라고 한다면, ‘고야’만이 진정한 화가인 것이다. ‘그’가,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나는 너와 생각이 달라” 무조건적 ‘복종’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그건 네 말이 맞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자신의 가치판단을 앞세워 불복종하거나 혹은 조건적인 ‘복종’을 한다면, 사랑이 아니거나 혹은 그 ‘복종’만큼이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복종’이다. 누군가 거부감을 가지던 그렇지 않던, 이는 변치 않는 삶의 진실이다. 그런데 이 삶의 진실만으로 사랑에 이를 수는 없다. 삶은 언제나 모순과 역설투성이니까.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사랑’이다. 쉽게 말해, ‘사랑’은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자명한 삶의 진실이다. 왜 사랑에 목을 매는가? 두려움·외로움·우울 그리고 끝내 허무. 이러한 지독한 ‘슬픔’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랑만이 진정한 ‘기쁨’을 주기 때문 아닌가? 이제 ‘사랑=복종’이라는 삶의 진실을 앞에서 하나의 모순과 역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 삶에서는 누군가에게 ‘복종’할 때, ‘기쁨’보다는 ‘슬픔’이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복종’이 ‘슬픔’이라면, ‘사랑’은 ‘슬픔’이 아닌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랑’은 ‘기쁨’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모순과 역설로 둘러싸인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면 ‘복종’과 ‘기쁨’(혹은 ‘슬픔’)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존재가 등장했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는 그 존재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모종의 ‘슬픔’을 느끼게 되곤 한다. 이 ‘슬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반발심’과 ‘자기파괴’이다. ‘반발심’이라는 ‘슬픔’부터 말해보자. “곱창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야.”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말에 ‘복종’하고 싶지만, 기묘한 슬픔이 들러붙는다. 헛된 주체 의식으로 인한 ‘슬픔’이다.
“나는 너에게 영향받지 않겠어.” 과도한 주체 의식을 가진 이들이 있다. 이들이 좀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은 침범이다. 사랑은 한 존재가 내 속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일이다. 이는 주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주체성이 상실되어 상대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과도한 주체 의식을 가진 이들은 그 ‘복종’ 앞에서 반발하게 된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기에 곱창이 정말 맛있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주체 의식을 가진 이들은 그 맛있음(기쁨)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과도한 그래서 헛된 주체 의식을 가진 이들은 사랑(침범)이 시작되려는 과정에서 지독한 ‘반발심’(슬픔)에 잠식된다. 이들은 ‘복종’의 ‘기쁨’(맛있음)을 ‘슬픔’(반발심)으로 뒤집어서 ‘사랑’의 초입에서 튕겨(반발!) 나간다. 이들은 헛된 자기애 때문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또 하나의 ‘슬픔’이 있다. ‘자기파괴’로 인한 ‘슬픔’이다. “고야만이 진정한 화가야”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헛된 자기애가 없는 이들은 ‘그녀’와 함께 ‘고야’의 그림을 보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분명 ‘그녀’와 함께 고야를 보며 ‘기쁨’을 느꼈지만, 그 ‘기쁨’ 사이로 기묘한 ‘슬픔’이 들러붙는다. 자신이 점점 파괴되는 ‘슬픔’이다. 항상 고야 그림을 보는 ‘그녀’와 함께 할 때, 지독한 어둠(슬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해서 ‘복종’했지만, 그 결과로 나 자신이 파괴되는 ‘슬픔’이 찾아오게 될 때가 있다.
폭력적인 섹스에서 ‘기쁨’을 느끼는 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자신 역시 폭력적인 섹스에서 ‘기쁨’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의 폭력성이 정도를 더해 갈 때 그 ‘기쁨’은 결국 나 자신을 파괴하는 ‘슬픔’에 가닿게 된다. ‘사랑’은 ‘복종’이기에 상대에 따라 그 ‘복종’이 자기 파괴적 ‘슬픔’으로 이어지게 되기도 한다. 이는 ‘복종’의 ‘기쁨’(고야·섹스)이 ‘슬픔’(자기파괴)으로 뒤집어져서 ‘사랑’이 너무 일찍 끝나버린(파괴!) 경우이다.
‘사랑’은 ‘기쁜 복종’이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얼마나 멀고 험한가? ‘사랑’은 헛된 주체 의식과 미숙한 타자를 통과해야지만 이를 수 있는 곳이니까. ‘사랑’의 토대는 ‘나’와 ‘너’에게 모두에게 있다. 진정한 ‘사랑’을 원하는가? 가장 먼저 헛된 주체 의식(‘나’)과 결별해야 한다. 그렇게 ‘복종’의 ‘기쁨’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사랑해서 ‘곱창’의 맛을 알게 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무조건적 ‘복종’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라는 ‘신’이 미숙하다면, 그 ‘기쁨’은 이내 ‘슬픔’이 된다. 죽음의 냄새가 드리운 그림(섹스)만을 욕망하는 ‘그녀’를 사랑할 때, 우리 역시 죽고 싶을 수밖에 없다. 그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미숙한 ‘신’과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경배할 새로운 ‘신’을 다시 찾으러 나서야 한다. ‘복종’의 ‘기쁨’을 (‘자기파괴’적 슬픔이 아닌) ‘자기 생성’적 ‘기쁨’으로 승화시켜 줄 ‘신(너)’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 멀고 험한 여정 끝에 바로 그 ‘신’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에 이른다. ‘나’의 ‘신’이 ‘나’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애(기쁨)’에 이르게 된다. ‘나’의 ‘신’이 ‘나’에게 “더 나은 네가 되어라!”고 명령할 때, 진정한 ‘자기 생성’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신’을 향한 ‘복종’은 끝내 가장 큰 ‘기쁨’을 준다.
‘자유’다. 오직 '사랑'해 본 이들만이 알고 있는 사랑의 역설이 있다. ‘사랑’은 ‘복종(부자유)’이기에 ‘자유’다. ‘너’를 향한 ‘복종’이 곧 ‘사랑’이고, 이 ‘사랑’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자유’, ‘나’를 넘어 새로운 ‘나’로 생성될 ‘자유’를 준다. 헛된 자기애(나)와 미숙한 타자(너) 너머 ‘복종’의 '기쁨'을 알게 되는 ‘사랑’에 이르렀을 때, ‘자유’라는 꽃이 핀다. ‘사랑’은 ‘복종’이며, ‘기쁨’이며, ‘자유’라는 이름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