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씨네쓰기

<밀양>

by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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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Secret Sunshine, 2007) 이창동

* 이창동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작가주의 감독이다. 한국에 유능한 영화감독은 많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창동과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 한국의 그 어떤 영화감독도 이창동이 도달한 깊이에 이르지 못했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연민과 애정에 나오는 그 깊이.

그는 국어 교사, 소설가, 각본가를 거쳐 마흔이 넘어 영화감독이 되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중편소설 <전리>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92년,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 창작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수상한 이후, <초록물고기, 1997> <박하사탕, 2000>, <오아시스, 2002> <밀양, 2007> <버닝, 2018> <심장소리, 2022>등 세계 영화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창동이 좋다. 그의 리얼리즘을 좋아한다. 이창동은 날 것 그대로의 삶을 보여준다. 이창동의 리얼리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이다.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는 분명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이들이다. 누구도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위험인물(범죄자, 예측 불가 장애인)이나 불쌍한 존재(사회 부적응자, 동정받는 장애인)로 표현될 뿐이다. 오직 이창동만이 날 것 그대로의 그들의 사랑을 말한다.

<시>의 ‘미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분명 존재한다. 돈 500만 원이 없는 삶, 벽에 식탁을 붙여야 할 만큼 좁은 아파트, 냄새가 화면 밖으로 전해질 것 같은 낡은 방. 이런 ‘가난’은 종종 표현되지만, 이창동만큼 ‘리얼’하게 표현하는 이들은 드물다. 이창동은 그런 ‘가난’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가난’을 더 아름답게 혹은 더 불행하게 포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이 이창동에게 무관심과 불편함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리얼리즘은 고통을 준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 안에 있는 ‘종두’와 ‘공주’와 ‘미자’를 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종두’와 ‘공주’와 ‘미자’는 존재하되, 나와 충분한 거리가 있는 상태로 포장되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진실이 드러내는 고통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의 리얼리즘은 우리에게 고통을 쏟아부어 삶의 진실을 알린다. 그의 리얼리즘은 ‘종두’와 ‘공주’, ‘미자’가 그리고 ‘신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그들 역시 우리처럼 사랑하고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있는 힘껏 외친다. 그의 리얼리즘은 인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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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이 깔릴 때, ‘밀양密陽’이 내리쬐어 주기를. 그렇게 죽는 날까지, ‘인간’ 속에서 ‘인간’으로 살다 갈 수 있기를.


1.

내게는 두 명의 사촌 형이 있었고, 지금 한 명뿐이다. 고모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고모는 나와 누이에게 그 흔한 용돈 한 번 줘본 적이 없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새집을 짓던 시기였다. 그 공사를 첫째 사촌 형이 도맡았다. 아마 그 역시 돈을 아끼려고 그랬던 것일 테다. 공사 잔금을 치르는 날이었다. 술을 좋아했던 사촌 형은 그날 기분이 좋았던지,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고 현금다발이 든 가방에서 돈을 꺼내 술값을 냈던 모양이다.


퍽치기였다고 했다. 벽돌이었던가. 퍽치기범은 둔탁한 것으로 사촌 형의 머리를 내려치고 돈을 훔쳐 달아났다. 사촌 형은 어찌어찌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고모가 공사 잔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악을 쓰며 사촌 형을 때렸다고 했다. 고모는 아마 이상한 말을 반복하는 사촌 형을 보고 술이 덜 깨서라고 생각했겠지. 사촌 형은 큰 병원에 입원했다. 내가 병문안을 갔던 첫날에는 나를 알아보았고, 둘째 날에는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했다. 사촌 형은 며칠 뒤에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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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돈밖에 모르는 고모가 있었고, 지금은 없다. 오싹했다. 고모가 준 용돈을 받아 들었을 때, 어린 나이였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고모는 변했다. 아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니 그것을 혐오 대상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누구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집안에는 온통 십자가와 성경, 그리고 예수 사진이 널려 있었다. 그날, 용돈을 받던 집안에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고 지냈다. 불현듯 고모와 사촌 형이 생각난 것은 정신없이 붐비던 어느 백화점에서였다. 첫째 아이가 세 살 즈음이었을까? 잠시 핸드폰을 본 것일 뿐이었다. 정말이다. 아이가 사라졌다. 붐비는 인파들 속에 잘 걷지도 못하는 작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근처에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1분, 1분, 또 1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가 아이를 삼켜버린 것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갖 나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백화점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녔다. 그날, 잊고 있었던 고모와 사촌 형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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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애’는 어떤 사람일까? 죽은 남편의 고향에서 아이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하려는 강인한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지독한 연약함은 때로 강인함으로 오해된다. 지독한 연약함으로 섣불리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가. ‘신애’는 지독히도 연약한vulnerable 사람이다.


“나도 그 인간 보고 싶다.”

“매형, 누나 배신하고 딴 여자랑 바람까지 났었잖아.”

“아냐 인마, 그거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거야. 준이 아빠는 우리 준이랑 나만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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