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씨네쓰기

<희생>


희생(The Sacrifice, 1986)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 소련의 영화감독. 『킬러, 1956』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1961』 『이반의 어린 시절, 1962』 『안드레이 루블로프, 1966』 『솔라리스, 1972』 『거울, 1975』 『스토커, 1979』 『노스탤지어, 1983』 『시간 여행, 1983』 『희생, 1986』 타르콥스키는 총 8편의 작품을 남겼다.

타르콥스키는 1932년 러시아의 자브라체에서 태어났다.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바라를 보며, “자신의 눈에 보이는 해저의 느린 물결을 카메라로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이라고 말한 고다르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영화 언어를 만들어 냈다.” 잉마르 베리만의 말처럼 타르콥스키는 새로운 영화적 문법을 만들어 내었다. 보통의 영화가 산문이라면, 타르콥스키의 영화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타르콥스키는 시간을 각인하는 영화 시인이다.

타르콥스키는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겪은 예술가이다. 그는 소련에서 태어났지만, 소련 당국의 탄압으로 더 이상 자국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유럽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진정한 믿음은 이미 사라졌고, 물질과 소비의 쾌락에 젖어 있는 유럽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시간의 각인(봉인된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대다수 현대인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면 위대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망명 후 그는 물질적 세계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 때문일까? 그는 이탈리아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노스탤지어』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영화였다면, 그의 유작 『희생』은 소련 당국의 방해로 생이별해야 했던 아들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전쟁과 공산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모두 거쳐 삶의 진실에 이른 타르콥스키는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정신적 발전은 물질적 발전보다 열등하며 우리는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발전 과정이 조화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영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최근 지구상의 삶은 우리 개인의 자아를 가능한 빨리 구원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삶을 나아가 예술을 부정하도록 만들어버린 것 같다.… 그렇기에 예술과 구원의 문제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으며 제때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타르콥스키는 삶의 마지막에 이를 때조차 영화감독으로서, 한 명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 했다. 그는 암으로 투병 중에 『희생』을 만들었다. 그의 암은 『스토커』 촬영 당시 소련이 공업지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오염된 에스토니아 털린에서 촬영 중 얻은 병이었다. 『희생』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 투병 중인 타르콥스키를 대신해 그의 아들이 대리 수상했다.

그는 『희생』을 마지막으로 1986년 12월 29일 파리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화로 살다가 영화로 죽은 영화 시인이다. 아니 시간을 각인하려던 그의 바람처럼, 타르콥스키는 ‘봉인된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르콥스키가 우리에게 넘겨준 세상에서 타르콥스키는 영원히 살아 있다. 거장은 죽지 않는다.

“나의 아들 ‘앤드류사’를 위해, 희망과 확신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듭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가? 삶이 남았다면 ‘헌신’하고, 삶이 다해간다면 ‘희생’할 수 있기를.


1.

“자네는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전에는 그렇게 느꼈지. 하지만 아들이 태어난 후로는 달라졌네.”


‘고센’에게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넘겨줄 수 있는가? 늦둥이인 아들을 얻은 후, ‘알렉산더’가 늘 마음속에 품어온 질문이다. 세상은 불행의 영원회귀인지도 모른다. 신분에서, 이념으로, 다시 자본으로 이름만 바뀐 채 전쟁은 반복되고 있다. 조금의 안목만 있다면, 불행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다는 직감은 피할 길이 없다. 이 불행의 사슬을 끊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고센’이다.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문제 넘어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노년의 ‘알렉산더’는 ‘고센’에게 더 나은 세상을 넘겨주고 싶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만약 매일 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늘 꾸준하게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거다.”


‘알렉산더’가 찾은 답이다. 그는 자신이 찾은 답으로 실천하며 삶을 살았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는 간절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노력해서, 바닷가 근처 소나무 밑에 있는 화사한 ‘집’을 찾았다. 그 ‘집’은 ‘고센’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찾은 장소였다. 하지만 그 ‘집’에서 태어난 ‘고센’은 ‘실어증’에 걸렸다. ‘알렉산더’는 깊은 우울과 분노,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매일 종교적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노력해서 얻은 ‘집’에서 정작 ‘고센’은 행복은커녕 말조차 잃어버린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난 고센을 끔찍하게 아끼고 있네, 허나 이 모든 일에 분노 또한 느끼고 있네. 난 조금 나은 삶을 위해 항상 노력했네. 그래서 철학, 종교, 미학을 공부했지. 그러나 내 선택의 결과는 지식의 사슬로 나를 구속하는 꼴이 됐지.”


무엇이 문제였을까? ‘알렉산더’는 연극배우이자 대학교수이자 저널리스트다. 그는 철학과 종교, 미학(예술)을 공부한 지식인이다. 그 지식(언어)으로 돈(물질)을 벌었다. ‘알렉산더’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간절하고 꾸준한 노력은 ‘언어(논리)’와 ‘물질’이었다. ‘알렉산더’의 ‘집’은 ‘언어(논리)’와 ‘물질’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그 ‘집’으로 ‘고센’에게 더 나은 세상을 넘겨줄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신조차 ‘언어(논리)’의 사슬로 갇히게 된 ‘집’에서 어떻게 ‘고센’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의사 친구인 ‘빅토르’의 ‘수술(물질)’로도 ‘고센’의 ‘실어증’은 고칠 수가 없다. ‘언어’와 ‘물질’은 ‘고센’의 세계의 말문을 틀어막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우울과 분노, 허무는 자신이 지은 ‘집’으로는 ‘고센’에게 더 나은 세상을 넘겨줄 수 없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이제 ‘알렉산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왜 세상의 불행은 계속 반복되는가? ‘알렉산더’의 생일에 3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전쟁의 참극을 알고 있는 ‘알렉산더’와 그의 아내 ‘아델라이드’,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고센’을 ‘수술’해 준 의사 ‘빅토르’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다. 그들은 다시 반복되는 참혹한 불행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약’과 ‘술’이다. ‘알렉산더’는 ‘술’을 마시고, ‘빅토르’는 ‘아델라이드’에게 진정제를 놓는다. 심지어 전쟁의 공포를 미처 알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은 진정제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알렉산더’의 딸, ‘마르타’에게까지 진정제를 투여한다.


이것이 우리가 불행에 대처하는 자세 아닌가? 삶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물질’에 의존한다. 삶이 무너져 내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그 불행과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것을 견뎌내려고 하기보다 그저 손쉬운 ‘돈’, ‘약’, ‘술’이라는 ‘물질’에 의존한다. 누군가는 ‘물질’을 주입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주입받는다. ‘물질’에 잠식당한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못한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은커녕 모두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아델라이드’를 보라.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약’에 취해 곤히 자는 아들, ‘고센’을 집요하게 깨우려 한다. ‘물질’로 불행의 나락에 떨어진 자는 모두를 불행의 나락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심지어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소중한 자일지라도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 불행(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습 아닌가. 하지만 ‘물질’은 때로 삶의 진실을 섬광처럼 비추곤 한다. ‘아델라이드’는 불행과 공포를 외면하려 ‘물질’에 지독히 취했을 때 비로소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대체 왜 이 지독한 불행은 우리를 찾아왔는가?


“왜 우리는 항상 원하는 것의 반대로만 하는 거죠.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결혼은 다른 남자와 했어요.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우리는 누구한테도 의지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런지 전 항상 반항적이었어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항상 싸워왔어요. 내 안에 있는 다른 내가 말했죠. 결코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말고, 어느 것하고도 타협하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넌 죽게 된다고. 하나님, 저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영원히 반복되는 불행은 근본적으로 어디서 왔는가? “항상 원하는 것의 반대로만” 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결혼은 사랑이 없는 다른 남자와 했기 때문이다. ‘아델라이드’는 왜 그랬을까? 누구한테도 의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믿고 싶지 않은 이들은 항상 반항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항상 누군가와 싸울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는 이들, 누구도 믿고 싶지 않은 이들은 항상 자신에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말라고, 어느 것하고도 타협하지 말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죽게 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주체성은 불신이 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행이 된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불행만이 있을 뿐이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반항적인 싸움(전쟁)뿐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불행이 닥쳤을 때, 그리고 그 불행을 외면하기 위해 ‘물질’에 잠식당했을 때, 우리는 때늦게 가장 높은 ‘정신(신)’을 찾게 된다. “하나님, 저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3.

세상은 어떻게 구원되는가? ‘오토’와 ‘마리아’를 통해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가장 먼저 우리는 ‘오토’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니 믿어야 한다. ‘오토’는 우편배달부이자, 수집가이다. 진실하지만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을 모으는 수집가다. ‘오토’는 ‘언어(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284개나 알고 있다. 삶의 진실을 전해주는 ‘오토’는 우편배달부일 수밖에 없다.“진실을 밝히는 데는 시간도 많이 들고, 여행도 해야 하고 돈도 많이 필요하죠. 우편배달은 그래서 하는 거죠.” ‘오토’는 ‘언어(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삶의 진실을 알리는 메신저다.


‘오토’는 ‘알렉산더’에게 ‘전쟁’을 마치 없던 일처럼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당혹스럽다. 자신의 하녀인 ‘마리아’와 동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오토’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아델라이드’가 ‘물질’에 취해 있다면, ‘알렉산더’는 ‘언어(논리)’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너무 큰 불행이 닥쳐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센’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지성’을 넘어 ‘직관’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알렉산더’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토’의 말을 믿고 ‘마리아’를 찾아간다.



‘마리아’는 하녀이자 성모이다. ‘마리아’는 하녀다. ‘알렉산더’의 더러운 손을 씻겨주는 정화의 존재이다. ‘마리아’는 성모다. ‘알렉산더’와 ‘고센’ 모두를 살게 해주는 구원의 존재이다. ‘알렉산더’는 ‘마리아’에게 어머니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계셨을 때, 어머니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정원을 가꾸었다. 그리고 지친 몸으로 정원을 바라보았을 때, 그 정원은 아름답기는커녕 마치 폭력이 휩쓸고 간 현장처럼 추한 모습이었다고 고백한다.


정원의 자연다움(자연미)을 파괴할 때, 세상의 인간다움(인간미)마저 파괴된다. 어머니를 위해 정원을 가꾸었던 일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아마 그것은 어머니를 파괴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영원회귀 아닌가?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었지만 정작 아이는 외롭고, 그 외로운 아이는 다시 돈만 버는 부모가 되고, 그 부모는 다시 아이를 외롭게 하는 불행의 영원회귀.


‘알렉산더’는 이 지독한 영원회귀의 굴레를 끊고 싶다. 어머니에게 했던 잘못을 ‘고센’에게 반복하고 싶지 않다. 소중한 이를 위한다고 했던 일들이 더 끔찍한 일이 되어버렸던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알렉산더’는 ‘마리아’를 통해 과거의 사슬을 끊고 ‘고센’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고 싶다. ‘알렉산더’는 동침을 거부하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절박하게 부탁한다.



“마리아, 내 존재는 전적으로 당신께 달려 있소. 나를 사랑해 줄 수 없겠소? 제발 나를 사랑해 주오. 나를 구원해 주오, 우리를 구원해 주오. 마리아”


‘알렉산더’는 ‘마리아’와 사랑을 나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이다. 중력을 따르는 사랑은 무엇인가? ‘물질(섹스)’과 ‘언어(제도)’의 사랑이다. 이는 이성애로 점철된 소유욕(연애)이거나 사회적 인정으로 점철된 안정감(결혼)이다. ‘마리아’와의 사랑은 그 모든 중력을 거슬러 가는 사랑이다. ‘마리아’와의 동침은 영혼의 섹스(성모와의 결합)이며, 제도를 넘어서는 사랑(하인과의 불륜)이다.


그 ‘마리아’에게 사랑받을 때 정화되고 구원된다. 때로는 하인처럼 우리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씻겨주며, 때로 성모처럼 우리의 삶을 구원해 주는 ‘마리아’. 우리의 존재는 전적으로 ‘마리아’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독한 불행 앞에서 절박하게 애원할 수밖에 없다.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나’를 구원해달라고, ‘나’와 ‘고센’ 그리고 우리 모두 구원해 달라고. ‘마리아’가 없다면, ‘마리아’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불행의 영원회귀는 끊을 수 없다.


왜 불행은 반복되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저 ‘물질’과 ‘언어’로 자신을 지키거나 중력적 사랑을 지키려 할 뿐, ‘물질’과 ‘언어’ 너머에 있는 ‘마리아’를 찾으러 가지도, 절박하게 사랑을 요청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물질’과 ‘언어’ 너머에 있는 ‘오토’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마리아’에게 사랑받아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 방법 이외에 한 개인이 한 사회가 정화되고 구원되는 일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4.

‘물질’과 ‘언어’를 내려놓고 ‘마리아’와 동침한 ‘알렉산더’는 다음 날 자신의 ‘집’에서 눈을 뜬다. 거짓말처럼 ‘전쟁’은 없던 일처럼 되어있다. 세상을 구원했다. 아니 세상은 구원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알렉산더’와 ‘마리아’의 동침도, 그 동침으로 인해 세상이 구원되었다는 사실도 알 길 없는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우울, 분노, 허무한 상태 그대로다. 알렉산더는 직감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물질’과 ‘언어’에 사로잡힌 이들의 우울, 분노, 허무는 필연적으로 다시 ‘전쟁’을 불러올 것이다.


‘마리아’에게 구원받은 ‘알렉산더’는 다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희생’이 필요하다. 마지막 ‘희생’. ‘알렉산더’는 ‘총’을 넣어두고 ‘집’을 불태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집’을 불태워야 한다. ‘알렉산더’의 ‘집’은 ‘물질’과 ‘언어’로 지어진 ‘집’이다. 그 ‘집’이 남아 있는 한, ‘물질’과 ‘언어’는 지속될 것이며, 그것이 지속되는 한 ‘마리아’와 사랑은 이어질 수 없고, 이는 ‘고센’에게 더 나은 세상도 남겨줄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알렉산더’는 침묵으로 ‘집’을 불태운다.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그 화염 속에서 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말없이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다. 그는 말없이 외칠 수밖에 없다. 세상을 구원할 ‘오토’와 ‘마리아’에 대한 믿음은 ‘물질’과 ‘언어’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물질’과 ‘언어’를 불태우며 침묵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아빠.”


‘알렉산더’의 ‘희생’으로 ‘고센’은 ‘언어’를 얻었다. 이제 ‘고센’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시작할 수 있다. 태초의 말씀은 물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센’은 태초의 말씀이 무엇인지 묻는다. ‘알렉산더’가 자신의 ‘희생’으로 불행의 영원회귀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신의 ‘믿음’은 사라졌기에 ‘고센’은 다음 ‘믿음’을 물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알렉산더’가 ‘고센’에게 더 나은 세상을 넘겨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센’에게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열어주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물질’과 ‘언어’가 불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나무에 ‘고센’은 혼자 남아 물을 준다. 그 나무가 시들어 버릴지 아니면 자라서 꽃을 피울지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고센’에게 오롯이 남겨졌다.



4.

“헌신이란 우리가 경탄하는 대상을 향한 사랑이다.” 『에티카』 스피노자


‘희생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희생’은 슬픔이다. 슬픔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었다. 타르콥스키를 통해 이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슬픔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슬픔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끝내 남겨지는 것은 죽음뿐이다. 슬픔은 우리는 죽음으로 몰고 가니까. “만약 우리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알렉산더’의 읊조림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부끄럽게도, 아직 젊은 몸뚱아리를 가진 나는, 살고 싶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희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고센’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남겨주고 싶은 나는, ‘오토’를 믿게 된 나는, ‘마리아’를 찾고 있는 나는, 알고 있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선물해 주고 싶다면, 어쩔 수 없다. ‘희생’해야만 한다. 그것이 끝내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죽음(침묵!)의 화염인 것을 알면서도, 그 슬픔의 독배를 마실 수밖에 없다. 타르콥스프키는 내게 한동안 멈출 수 없는 눈물과 함께 하나의 삶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희생으로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눈물이 마른 뒤, 철학자로서 다시 묻게 되었다. 슬픔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반드시 기쁨이다. 젊든 늙었든 마찬가지다. 이제 하나의 모순 앞에 섰다. ‘알렉산더’의 ‘희생(슬픔)’은 기쁨인가? 그렇다. 어떤 슬픔은 기쁨이 된다. 타르콥스키가 놓친 삶의 진실이 있다. 생의 끝자락에서 ‘희생’은 ‘헌신’이 된다는 사실이다.


‘헌신’은 우리가 경탄하는 대상을 향한 사랑이다. ‘알렉산더’는 ‘고센’과 ‘오토’, 그리고 ‘마리아’에게 ‘경탄’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했다. 그것은 ‘헌신’이다. 이것이 ‘알렉산더’가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던 이유다. 그것이 슬픔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에게 아직 생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뿐이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일은 ‘희생(슬픔)’이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다. 죽음 앞에 섰을 때이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 ‘희생(슬픔)’은 ‘헌신(기쁨)’이 된다.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알렉산더’ 아니 타르콥스키에게 슬픈 침묵의 화염은 기쁨이었을 테다. 암과 사투를 벌이며 죽어가며 『희생』을 마무리한 타르콥스키에게 『희생』은 결코 ‘희생’이 아니었을 테다. ‘헌신’이었을 테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고센’을 향한 ‘헌신’으로 마지막 불꽃을 피웠을 테다. 세상은 오직 ‘헌신’으로 변할 수 있다. 타르콥스키가 허락한다면, 『희생』이라는 제목은 바뀌어야 한다. 『헌신』으로.


나는 타르콥스키(예술가)가 남겨준 세상을 철학자로서 물려받으려 한다. 자리이타! 생이 아직 남았다면 기쁨(헌신)으로 세상을 바꾼다. 소신공양! 생의 끝자락에 왔다면 남겨진 유일한 기쁨(희생)으로 세상을 바꾼다. 삶이 남았다면 남은 채로 ‘헌신’하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남겨진 마지막 ‘헌신’을 할 수 있기를. 그렇게 기쁨으로 살고 죽을 수 있기를. 그렇게 내가 사라진 자리에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남겨지기를. ‘알렉산더’도 ‘타르콥스키’도 자신의 해야 할 일을 모두 다 했다. 이제 나머지는 ‘고센’과 나에게 맡겨두고 편히 쉬시길. 남겨진 앙상한 나무에 꽃이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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