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Kafka, 1991) 스티브 소더버그
*스티브 소더버그 : 미국의 영화감독. 1989년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 영화제 역대 최연소(26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영화계에 데뷔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존’, ‘앤’, ‘신시아’, ‘그레이엄’. ‘존’과 ‘앤’은 부부이며, ‘앤’과 ‘신시아’는 자매이다. ‘존’과 ‘그레이엄’은 동창이다. ‘존’과 ‘신시아’는 불륜관계이며, 이들은 이 사실을 ‘앤’에게 숨긴다. ‘앤’은 섹스에 대한 억압으로 스스로를 숨긴다. 이때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그레이엄’은 섹스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 이 기묘한 관계를 통해 소더버그는 현대인의 거짓과 위선이 ‘비디오테이프’라는 감시와 고백의 장치에 의해서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카프카』는 이러한 소더버그의 문제의식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연장선에 있다. 『카프카』는 ‘카프카’라는 작가의 삶과 그의 소설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카프카』는 ‘카프카’의 장편 소설 <성>과 <소송>을 모티브로 삼으면서 ‘카프카’의 실제 삶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영화 속 ‘카프카’가 쓰고 있는 소설은 벌레 이야기는 실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다.)
『카프카』는 거대한 권력 체제에 파편화된 개인들, 그로 인한 소외감을 보여주며, 그러한 사회 속에서 저마다 적응하거나 좌절하는 인간 군상들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통해 ‘진실이라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더버그의 『카프카』는 ‘카프카’를 그대로 담고 있지 않다.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주인공인 측량 기사 'K'는 끝내 성에 도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성’ 주위만을 서성거린다. 인간은 권력이라는 실체(성)에 다가서려고 하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더버그의 『카프카』는 ‘성’의 내부에 잠입해서 진실 체계를 목격한다.
소더버그의 『카프카』는 <성>의 ‘K’(Kafka!)와 달리, ‘진실’에 이른다. 하지만 『카프카』에게도 결여된 것이 있다. ‘실천’이다. 이는 타살이 분명한 ‘로스만’의 죽음에 대해 경찰과 같이 자살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오늘은 다를 줄 알았습니다.” 『카프카』의 말처럼, 인간의 내면은 결국 ‘진실’로 보아도, 아니 그 거대한 ‘진실’을 보았기 때문에 ‘실천’은 결여될 수 밖에 없다. 『카프카』는 인간을 그런 존재로 그리고 있다. 『카프카』의 이러한 암울한 결말은 위축된 개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카프카’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소더버그의 희망적 기획일지도 모른다. 소더버그의 『카프카』는 ‘진실’의 탐색 넘어 ‘실천’으로 나아가려는 다음 세대의 ‘카프카’를 부르는 외침인지도 모른다.
오직 외로운 개인만이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병약한 개인 넘어 강건한 개인에 이를 때 다른 ‘글’을 쓸 수 있다. 다음 세대의 ‘카프카’를 위하여!
1.
7년을 지냈던 ‘사무실’에서 내 삶은 흑백 영화였다. 동료들은 모두 무채색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박적인 ‘버글’은 늘 나의 출퇴근 시간을 감시했고, 그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다. 기계 같던 ‘버글’은 기계가 아니었다. 인간은 기계가 될 수 없다. 기계가 되려는 인간은 화장실에서 여자 나체사진을 훔쳐보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를 감시하던 ‘버글’의 인간다움은 일주일에 한 번 안마방으로 가는 일이었다. 흑백 영화인 삶에 늘 뒤틀어진 악역만 있는 건 아니다.
너그러운 ‘사장’이 있다. ‘사장’은 어딘지 모르게 삐딱한 나를 승진 시켜주며 말했다. “자네 스스로 작가라는 걸 즐기는 건 이해하네. 좀 더 활동적인 취미를 찾아보게” 나는 감읍했고, 충성했다. 흑백 영화 속 감시와 인정, 상과 벌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지독한 ‘한센병 환자’가 되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나이 지긋한 협력사 사장의 입을 틀어막아 죽여버렸다. ‘성’에서 나온 신사가 던져주는 알량한 ‘약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말이다. 카프카의 ‘사무실’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사무실’ 역시 무채색의 흑백 영화였다.
흑백 영화가 진실일 리 없다. 한센병에 질려버린 나는 어서 정신을 차리고 알록달록한 컬러 영화의 삶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저 멀리 보이는 위엄있는 ‘성’에 알록달록한 진실된 삶이 있을 것 같았다. ‘카프카’가 ‘문학’(자신의 독자인 ‘비즐백’)의 도움으로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 나는 ‘철학’의 도움으로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본론』이라는 묘비를 밀자 ‘성’으로 가는 입구가 나왔다. 흑백이었던 내 삶은 순식간에 컬러 영화가 되었다. 개안開眼 후, 컬러의 세계에서 처음 본 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다.
‘사무실’은 ‘돈(계급)’의 세계였고, ‘성’은 ‘자본(권력)’의 세계였다. ‘사무실’은 드러난 세계였고, ‘성’은 은폐된(그래서 소수만이 알고 있는) 세계였다. ‘자본(권력)’은 형체가 없고, ‘돈(계급)’은 형체가 있다. 형체 없는 ‘자본(권력)’은 형체를 갖춘 ‘돈(계급)’을 지배한다. ‘성’에서 본 것은 컬러풀한 진실이었다. “저 성은 아주 위엄있어 보이죠. 단, 멀리서 볼 때만요.” ‘성’을 드나드는 ‘비즐벡’의 말처럼, ‘성’은 언제나 아주 위엄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멀리서 볼 때만이다.
“노동자들에게 아내와 자식이 있지. 불행히도, 그게 미래의 일꾼을 지켜주는 거요.” ‘카프카’도 나도, ‘성’ 안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보았다. ‘자본(권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또 파괴하는지. 흑백이었던 ‘사무실’에서 벗어나 이른 컬러의 세계는 아름답기는커녕 끔찍한 ‘자본’(권력)의 세계였다. 그 세계는 컬러였기에 그 끔찍함이 더욱 생생하게 보였다. ‘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문하고 세뇌하는 끔찍한 세계였다.
‘자본’은 항상 (‘돈’을 인질로 삼아) 불안으로 고문한다. “돈 없이 어떻게 살아갈래?” 그리고 그 불안을 자본적 논리로 해소할 수 있다고 세뇌한다. “직장에 순종하면, 보험을 들면 불안은 사라질 거야” ‘성’ 안의 사람들은 이 고문과 세뇌를 더욱 정교화하기 위해 인간의 머리(마음)를 열어 현미경(생리학·심리학)을 들이댄다. 개안 후에 알게 되었다. 흑백의 ‘사무실’이 현실이라면, 컬러의 ‘성’은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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