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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에 대하여

by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변덕과 일관성 사이에서


“나, 영화 안 볼래?” “왜? 오늘 영화 보자며?” “그냥 갑자기 영화 보기 싫어졌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영화가 보기 싫다는 연인. 오늘은 만날 기분이 아니라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하는 친구. 평소처럼 업무를 하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직장 동료. 이런 변덕스러운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는 일인가. 세상 사람들이 변덕스러운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변덕스러운 이는 결국 자신마저 싫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말 사육사로 직장을 바꾼 이를 알고 있다.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회사는 가기 싫고 말을 키워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시작된 말 사육사는 한 달 즈음하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 이런저런 일을 떠돌았다. 그 사이에 그는 생계가 유지되지 않을 만큼 가난해졌고 끝내는 다시 평범한 직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 모든 일을 후회하고 있다. 정확히는 변덕스러운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일관성을 요구하는 이유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일관성을 요구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수긍 뒤에 묘한 찜찜함이 따라붙는다. 세상과 자신이 변덕스러운 마음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마냥 부정하면 되는 걸까? 수시로 변화되는 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일관성에 따라 나의 마음을 강압적으로 맞추고 살면 행복해지는 걸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변덕과 일관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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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스 스코투스의 ‘헥시어티’


‘변덕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일상적 질문은 하나의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존재(나)의 궁극적 실재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변덕과 일관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진짜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뒤집어 말해, ‘진짜 나’, 즉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실재성을 알 수 있다면, 변덕과 일관성 사이의 방황을 끝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유가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섬세하고 정교했기에, ‘예리한 박사Doctor Subtilis’라고 불렸던 스코틀랜드의 중세철학자가 있다. 둔스 스코투스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개체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형상’과 ‘질료’ 그리고 ‘헥시어티’다.


장미꽃이 하나(A)가 있다고 해보자. 그 꽃에는 색깔‧뿌리‧줄기‧꽃잎의 ‘형상’이 있고, 토양‧물‧햇볕이라는 ‘질료’도 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꽃(A)의 궁극적 실재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똑같은 ‘형상’과 ‘질료’를 갖는 다른 장미꽃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궁극적인 실재성을 가름하는 것은 ‘형상’도 ‘질료’도 아닌 바로 이 ‘헥시어티’다. 쉽게 말해, ‘A’를 ‘A’일 수 있게 하는 특성(궁극적 실재성)이 바로 ‘헥시어티’다.


‘헥시어티haecceity’는 무엇일까? 라틴어 ‘하이세이타스haecceitas’에서 나온 개념으로, 이는 ‘이것임this-ness’를 의미한다. ‘이것임’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꽃(이것)’이 ‘저 꽃’도, ‘그 꽃’도 아닌 바로 ‘이 꽃(이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특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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