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될 거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종종 해 주는 말이다.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나를 보며, 주변 부모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게 친절한 조언을 해 준다.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줘야 해요.” 그 부모에게 “자존감이 무엇인가요?”라고 되묻고 싶지만, 이제 그런 부질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분들의 선의를 알고 있으며 동시에 역량 없는 선의는 때로 악의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언제 성숙하는가? ‘끝의 기쁨’을 알게 될 때다. ‘끝의 기쁨’은 성취의 단맛이 아니다. 성취의 단맛은 ‘자신감自信感’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존감自尊感’은 되지 못한다. 성취의 기억이 쌓이면 그 기억만큼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自에 대한 믿음信이 생긴다. 하지만 그 믿음은 ‘나는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충분하다!’는 자신自을 존중尊하는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턱없이 부실한 자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끝의 기쁨’은 좌절의 쓴맛에서 온다. ‘끝의 기쁨’은 환희의 탄성이 아니라 서러운 눈물이다. 온 마음을 다해 무엇인가를 이루려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그 기다림과 노력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적이 있는가? 그래서 서러움에 목이 메일 정도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 비로소 한 인간은 성숙한다. 그 ‘끝의 기쁨’이 쌓일 때, 비로소 자신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잘될 것 같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이, 잘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 속에서만 최선을 다하는 이, 잘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미리 포기하는 이. ‘끝의 기쁨’을 모르는 이들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다. ‘끝의 기쁨’을 모르는 이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의 기쁨’을 모르는 이가 어찌 누군가에게 ‘끝의 기쁨’을 알려 줄 수 있단 말인가. 오직 한 인간으로 성숙하려는 지난한 고통을 지나온 ‘어른’만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
좌절의 쓴맛으로, 서러운 눈물로, ‘끝의 기쁨’을 알게 된 이들은, 그것이 왜 기쁨인지 알게 된다. ‘끝의 기쁨’은 성취 혹은 좌절과 상관이 없다. 삶의 하나의 장場을 끝냈을 때, 찾아오는 그 먹먹한 기쁨을 알고 있는가? 온 마음을 다한 일이 끝났을 때, 마음속 싶은 곳에서 차오르는 먹먹한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은 자신이 원하는 결말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이 없다. 삶의 하나의 장이 아름답게 매듭지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찾아오는 깊은 기쁨이 있다.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그 ‘끝의 기쁨’이다. 바로 그 때문에 너무 늦지 않게 우리 자신 역시 ‘끝의 기쁨’을 배워나가야 한다. 누구나 언젠가 ‘아이’를 가르쳐야 할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잘 안될 것 같은 일임을 알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겠다. ‘아이’가 하나의 장을 눈물로 끝 내었지만, 다시 새로운 장을 씩씩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나의 마지막 장이 끝났을 때조차 깊은 기쁨을 맞이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