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물, 생물, 인간의 차이
‘무생물(돌멩이)-생물(식물·동물)-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돌멩이(무생물)’의 ‘정신’은 외부 ‘물질’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내부 리듬이 항상 동일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무생물은 과거를 단순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죠.
가장 낮은 정도의 정신–기억 없는 정신–일 순수 지각은 진정으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대로의 물질의 부분일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돌멩이도 분명 ‘정신’을 갖지만, 이는 “가장 낮은 정도의 정신”이겠죠. 이는 어떤 정신일까요? 바로 “기억 없는 정신”이겠죠. 돌멩이의 정신에는 ‘기억’이 없기에 과거를 차이 없는 형태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반면 생물의 ‘정신’은 어떤가요? 식물·동물은 ‘기억’이 있는 ‘정신’을 갖고 있죠. 그래서 생물은 과거를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죠.
꽃은 물이 있는 쪽으로 뿌리를 뻗고 햇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죠. 또 개는 음식이 있는 쪽으로 가고, 맞으면 도망가죠. 이는 생물의 ‘정신’이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꽃이 물을 흡수했던 기억, 햇볕을 쬐었던 기억 그리고 개가 음식을 먹었던 기억, 몽둥이로 맞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죠. 즉, 꽃과 개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외부 ‘물질(물·햇볕·음식·몽둥이)’을 수용해서 내부의 리듬을 바꿀 수 있어요. 그래서 생물은 차이 나는 반복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하지만 생물의 이런 수용은 즉각적이죠. 즉 생물은 과거를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지만, 외부 ‘물질’(운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죠.
인간 ‘정신’의 힘!
그런데 인간의 ‘정신’은 어떤가요? 우선 인간 역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외부 ‘물질(물·햇볕·음식·몽둥이)’을 내적으로 수용해서 반응할 수 있죠. 물을 마시거나 햇볕을 쬐거나 음식을 먹거나 몽둥이를 피할 수 있죠.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죠. 인간의 ‘정신’은 외부 ‘물질’에 반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물질’을 ‘응축’할 수 있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지만 참을 수 있죠. 또 폭력을 피하고 싶지만, 기꺼이 폭력을 견뎌낼 수도 있죠. 즉 인간은 ‘물질’을 ‘응축’해서 차이 나는 반복을 할 수 있는 존재인 거예요. 이것이 인간이 무생물과 생물과 근본적으로 차이 나는 지점이죠. 이러한 차이는 ‘기억’으로부터 오죠.
인간의 잠재력은 무엇인가요? ‘기억’, 좀 더 정확히 말해 ‘순수 기억’이죠. 인간은 무생물(돌멩이)·생명(식물·동물)과 무엇이 다른가요? 바로 ‘기억’의 차이죠. 즉, 인간의 ‘정신’이 무생물과 생물의 ‘정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기억’을 갖고 있죠. 즉, ‘순수 기억’을 갖고 있죠. 인간의 ‘정신’은 더 많은 ‘물질(진동)’들을 ‘응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요. 바로 그 힘이 ‘순수 기억’이죠.
인간의 ‘정신’은 그 어떤 존재들보다 밀도 높은 ‘기억’을 갖고 있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의 최고로 큰 변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 거예요. 물과 음식을 참고 다이어트를 할 수 있고,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독재의 폭력 앞에 설 수 있는 것도 바로 ‘순수 기억’ 때문인 거죠. 또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어떤 감동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것 역시 우리의 ‘순수 기억’ 때문인 거죠. 그 ‘순수 기억(정신)’이 ‘물질(물·음식·몽둥이·그림·음악)’을 ‘응축’해서 새로운 창조를 해내는 거죠. 이것이 인간의 잠재성이자 힘이죠.
‘정신’과 ‘신체’의 불일치, ‘행동’의 부재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기억)’은 왜 외부 ‘물질’들을 ‘응축’하는 걸까요?
정신이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시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가 행동들로 현시되기 위해서이다. 행동들이야말로 정신이 신체와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인간의 “정신이 물질(운동)의 순간들을 응축시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서”예요.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진동(운동)’의 순간들을 ‘응축’해서 그것을 돈, 사과, 그림이라고 ‘지각’하게 되죠. 이는 사과를 먹기 위해서, 돈을 벌고 쓰기 위해서, 그림을 보기 위해서잖아요. 즉,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죠. 즉 어떤 ‘진동’에 대해서 적합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 인 거예요.
이 ‘행동’은 우리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행동’은 “정신이 신체와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예요. 즉 ‘정신’과 ‘신체’가 일치될 때 ‘행동’하게 되는 거죠. 이는 우리네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죠. ‘정신’과 ‘신체’는 분명 다르죠(이원론). 하지만 우리네 삶에서 그것은 통일되어야 하죠. ‘정신’과 ‘신체’가 따로 놀면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네 삶의 많은 문제들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요? ‘정신’과 ‘신체’의 불일치에서 오는 ‘행동’의 부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신’은 알지만, ‘신체’가 일을 안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정신’은 알지만, ‘신체’가 ‘나’를 위해서만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이 제대로(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겠죠. ‘정신’과 ‘신체’가 일치되어야 삶이 건강하게 유지되죠. ‘정신-신체’가 일치될 때 비로소 ‘행동’할 수 있게 되니까요. ‘너’를 사랑하는 ‘정신’(마음)과 ‘너’를 사랑하는 ‘신체’가 결합될 때 비로소 ‘너’를 위해 고되게 일(행동)할 수 있잖아요.
‘정신’과 ‘신체’는 ‘지속’ 속에서 일치된다.
이제 우리는 ‘정신’과 ‘신체’의 불일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정신’과 ‘신체’는 통일되어야 ‘행동’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정신’과 ‘신체’의 일치는 어디서 올까요? 바로 ‘지속’이죠. 쉽게 말해 우리를 빠져들게 만드는 것을 만났을 때 ‘신체’와 ‘정신’은 일치되고 그와 동시에 ‘행동’하게 되죠. 매혹적인 그림과 음악을 만나게 될 때, 즉 ‘지속’을 느낄 우리는 다시 미술관과 음악회를 찾게 되잖아요. 이처럼 ‘지속’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행동’하게 되잖아요. 아니 ‘지속’이 곧 ‘정신’과 ‘신체’의 일치이자, ‘행동’인 거죠.
‘정신’과 ‘신체’의 불일치 문제는 ‘지속’으로 해소할 수 있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정신’과 돈을 버는 ‘신체’는 왜 일치하지 않을까요? 지금 하는 일이 ‘지속’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정신’과 ‘너’를 사랑하는 ‘신체’는 왜 일치되지 않을까요? 그 ‘너’가 ‘지속’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지속’할 수 있는 일과 ‘너’를 만난다면, 우리의 ‘정신’과 ‘신체’는 일치될 테고, 동시에 ‘행동’하고 있을 거예요.
이 책의 모두에서 신체와 정신의 구별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의 이 난해한 말 역시 이제 이해할 수 있죠. ‘신체’와 ‘정신’은 구별은 ‘공간’에서 확립되지 않아요. 즉, 어떤 ‘공간’에서 일을 하느냐 혹은 어떤 ‘공간’에서 ‘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정신’과 ‘신체’가 구별되거나 일치되는 게 아니에요. 돈 많이 주는 직장에서 일한다고 ‘정신’과 ‘신체’가 일치하게 되는 게 아니죠.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매번 ‘너’와 식사한다고 ‘정신’과 ‘신체’가 일치하게 되는 게 아니죠.
‘신체’와 ‘정신’이 구별될 것인지 일치될 것인지의 문제는 진정한 ‘시간’, 즉 ‘지속’에 의해서 확립되는 문제인 거죠. ‘지속’되는 일을 할 때(하지 않을 때) ‘정신’과 ‘신체’는 일치(구별)될 것이며, ‘지속’되는 ‘너’를 만날 때(만나지 않을 때) ‘정신’과 ‘신체’는 일치(구별)되겠죠. 그렇게 우리는 ‘행동’하며 살 수 있게 되겠죠. ‘마음(정신)’과 ‘몸(물질)’은 ‘지속’을 통해 일치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