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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꼭 해야만 하는 건가요?

연애의 목적

연애는 꼭 해야만 하는 건가요?


기본적으로 나는 연애예찬론자다. 삶이 탐탁치 못하다거나 불행하다 여기는 사람들이 내게 조언을 구하면 내 처방전은 대체로 “연애하세요!”다. 나의 조언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항변과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내 고민은 연애 문제가 아니라 직장 문제라고!” “지금 제 고민은 연애로 해결될 정도 가벼운 것이 아니에요.”라는 식이다. 삶이 척박해졌기 때문일까? 마음이 척박해졌기 때문일까? 이제 사람들은 “연애는 꼭 해야만 하는 건가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제 연애하지 않는 삶,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는 삶 또한 다양한 삶의 한 형태라는 걸 확인을 받고 싶은 모양이다.     


 감히 누가 ‘삶은 이러해야 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동서고금의 역사적 불행은 대부분 ‘삶은 이러해야 해!’라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 아니던가. 그렇다면 사랑을 주고받는 삶 또한 다양한 삶의 형태로 인정해야 하는 걸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연애를 꼭 해야만 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내 대답은 언제나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렇다”이다. 이건 내가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상존하는 그 많은 고민과 문제들은 결국 본질적으로 ‘사랑’이란 것과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납득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이 문제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자.


우리는 모두 애정결핍환자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들에 비해 열등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을 ‘미숙아’로 본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동물들에 비해 열등할 뿐만 아니라 ‘미숙아’라니, 황당함을 넘어 불쾌감이 밀려온다.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인간과 동물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태어나자마자 혹은 태어나고 짧은 시간 이후에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갖는다. 물고기는 태어나자마자 헤엄을 칠 수 있고, 말은 태어 난지 몇 시간 만에 걸어 다닐 수 있다. 그렇게 포식자들을 피하거나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최소한 능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 짧게는 1~2년 길게는 3~4년 동안 인간은 ‘엄마’로 표상되는 어떤 존재가 없다면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다. 이건 굳이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구심이 든다. 다른 동물들보다 시간이 더 필요할 뿐, 인간도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정신분석학은 성인을 포함한 인간을 통칭해서 ‘미숙아’라고 단언했던 것일까?


 정신분석학은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는 유아기 시절에 인간 내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집중한다. 유아든 성인이든 인간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관련된 것이다.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강도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던 경험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 즉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런데 이 정도 크기의 트라우마를 유아기 시절에는 일상적으로 받는다. 기억하지 못할 뿐 갓난아이는 모두 부모의 보살핌이 없다면, 자신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이는 직감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결코 생존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갓난아이는 일상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부모라는 존재가 없다면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내면에 각인된다. 그 생존에 대한 불안은 결국 애정결핍으로 변형되어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된다. 이제 정신분석학이 왜 인간 전체를 미숙아로 보았는지 알 것도 같다. 유아기 시절에 필사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욕망했던 그 애정결핍은 성인이 된 인간에게도 집요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연애의 목적


불행하려고 연애하려는 사람은 없다. 연애의 목적은 분명 행복이다.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집요하게 우리에게 들러붙은 그 애정결핍이 잠시지만 해소될 때 찾아오는 감정일 게다. 우리는 행복 하고 싶다. 애정결핍에서 벗어나고 싶다. 친구에게 칭찬받고 직장 상사에게 인정받는 순간이 그리도 매혹적인 이유는 잠시지만 애정결핍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연애가 매혹적인 이유는 연애만큼 강렬하게 우리의 애정결핍을 해소시켜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일 테다.


 연애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일까? 그렇다. 연애하지 않고 살겠다는 데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면서 연애를 선택의 문제로 남겨두는 건, 먹지 않고 배고픔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당황스러운 말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애정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고, 그 애정결핍을 가장 많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연애다. 행복하고 싶다면서, 일에만 매달리고 돈에만 매달리는 건 목이 마르다면서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일과 돈으로도 애정결핍이 잠시 해갈될 수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로 점철된 인간관계에서 난무하는 인정, 칭찬, 관심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그런 가짜 사랑으로 애정결핍이 잠시는 해갈되겠지만, 이내 깊고 더 치명적인 갈증이 밀려올 수밖에 없다. 애정결핍을 해갈할 수 있는 건 진짜 사랑이다. 연애를 하면서 느끼게 되는 그 사랑의 감정. 애정결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사랑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연애는 선택의 문제일 수 없다.


 삶의 목적도, 연애의 목적도 같다. 행복. 행복은 사랑받을 때 온다. 그러니 연애, 해야만 한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안다. 누군가에게 진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고 매혹적인 경험인지. 그것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연애했으면 좋겠다. 사랑, 그것이 삶을 얼마나 건강하고 유쾌하게 해주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받으려고 기를 쓰며 살자. 그러기 위해 연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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