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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다.

왜 연애를 부정하게 되었을까?

“나는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을 가끔 만날 때가 있다. 이런 부류는 “연애를 꼭 해야만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 부류와 다르다. 후자는 그나마 낫다. 연애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영역에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는 연애를 선택의 영역에 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연애를 부정하고 기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왜 연애를 부정하게 되었을까? 


 연애를 부정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원인에서 기원한다. 첫째, 주체성이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인으로 살고 싶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다 알 듯이 연애의 표어는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다. 아무리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는 눈치 보는 수동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사랑의 역설을 직감하기에 어떤 이는 연애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두 번째 이유는 고백의 쪽팔림 때문이다. 연애라는 것은 우정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결이 맞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우정은 자연스럽게 돈독해진다. 하지만 연애는 다르다. 고백 없는 연애는 없다. 그런데 고백이라는 의식이 보통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 고백의 괴로움으로부터 애초에 벗어나고자 어떤 이는 연애를 부정하고 거부하곤 한다. “쪽팔리게 고백을 하느니 차라리 연애를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이별의 쓰라림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연애가 끝났을 때, ‘다시는 사랑 따위는 하지 않을 테야’라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걸. 사랑의 크기만큼 이별은 아프다. 헤어진 연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정리할 때 터져 나왔던 눈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연애라는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 이별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절절하게 경험한 사람은 종종 연애를 부정하고 거부하곤 한다. 


연애를 부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네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하다. 연애는 집요하게 우리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도록 만들기에 그것을 피하고 싶다. 재수시절 때였다. 함께 학원을 다녔던 친구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옆 반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는 거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친구의 고백을 여자 아이가 받아줬다는 거였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주말에는 영화도 보는 연인의 일상을 누렸다. 하지만 그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친구와 그 여자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라는 말과 함께 이별했다. 그 친구는 “대학 갈 때까지 연애 안 할 거야”라며 연애와 사랑을 부정했다.


 이것이 비단 재수학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연애는 우리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도록 강하게 압박한다. 연애의 놀라운 점은, 연애를 하게 되면 미래에 대한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대학 시절,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전공 수업을 빠지고 연인을 만나러 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주기 위해 적금을 깨기도 한다. 그래서 언제나 내일과 미래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은 사랑을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짓이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게 살라고 요구했다.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분명 언제나 내일과 미래를 위해 오늘과 지금을 희생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믿게 되었다. 내일과 미래만 보고 사는 것이 책임감 있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돈이든, 학력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믿어오지 않았던가.


사랑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도록 만든다. 뜨거운 연애를 하는 사람은 재수학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대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대학생은 전공 수업에 빠지는 것쯤은 우습다.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 역시 사랑에 빠지면 적금을 깨서 연인과 여행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두려운 일이다. 내일과 미래를 위해 오늘과 지금을 희생해오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그렇다. 사랑에 빠지면 오늘과 지금을 살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연애를 부정하는 사람은 두려운 것이다. 항상 미래를 준비하고 오늘을 희생하는 삶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꼈는데,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 정서적 안정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집요하고 아주 강한 압력으로 우리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도록 만드니까. 그래서 어떤 이는 그 내면화된 정서적 안정감, 그러니까 오늘을 희생하며 살 때 느껴지는 그 기묘한 자기 착취적 안정감을 위해 결국 사랑을 부정한다.


 행복이란 것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만이 사랑을 긍정하고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애를 하게 되어서 행복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연애는 부정과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과 소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삶을 사랑한다면, 연애는 결코 우회해서도 할 수도 없는 경험이다. 행복은 내일과 미래 어디 즈음에 있지 않다.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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