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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자존감

자존감이 낮다면 연애하자!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이제 자존감을 다시 정의하자.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내면이 확립되어 가는 시시기인 유아시절 부모나 혹은 부모 같은 존재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다. 유아기에 부모의 헌신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충분히 받았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믿게 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일지라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사람이란 걸. 그런 사람은 비교적 쉽게 자신의 나쁜 점과 단점조차 자신의 모습의 일부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에게 그런 나쁜 점과 단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분명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다면 그건 어린 시절 헌신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부모는 헌신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주었다기보다 그네들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 사랑해주었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는 냉담했다. 돌아보니 그랬다. 어머니는 성적이 잘 나온 날은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었고, 성적이 떨어진 날은 싸늘한 시선으로 짜증을 내기도 했으니까. 그때 나는 알았던 것 같다.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어야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나는 부정적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존감이 낮은 아이가 되어버렸다.


 주위를 돌아보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집에서 충분히 사랑받는 아이는 밖에서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집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날조해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 애를 쓴다. 정신분석학에 기반 한 이런 이야기는 분명 우리를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좌절감을 안겨준다.


과거는 돌릴 수 없다. 하지만


왜? 과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이유를 알았을 때, 한동안 부모를 원망했다. 그네들이 나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주었더라면 지금 나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테고, 나를 괴롭히는 그 많은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리고 부모 역시 버거운 삶의 무게를 버텨내느라 고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 아니던가. 그러니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염치없는 짓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었다면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이 낮은 자존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부모가 주었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니까.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첫째, 타임머신을 타고 유아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둘째, 지금이라도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 법이다.


 첫째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둘째는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이미 변했기에 불가능하다. 유아기에 사랑받는 기억의 합이 자존감으로 형성되는 건, 유아에게 엄마는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완전한 존재이기에 아이는 엄마의 사랑으로 자존감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 완전한 존재이기 보다 우리가 사랑을 주어야 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존재 아닌가. 그러니 두 번째 방법도 불가능하다.


지금 연애하면, 자존감 높아진다.


남은 세 번째 방법으로 각자의 이유로 힘든 삶에 버거워 많은 이들에게 “연애하세요!”라는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답변의 해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 방법은 연애다.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하지만 이 사랑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건 헌신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하며, 동시에 그 사랑을 주는 상대를 완전한 사람이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정이나 짝사랑, 혹은 받기만 하는 사랑으로는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우정은 상대가 있을 때 좋고, 없을 때도 상관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정은 헌신적이지도 무조건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존감이 높아질 리가 없다.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다. 짝사랑은 아무리 해도 사랑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자존감도 높아지지 않는다. 받기만 하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그 사랑은 분명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 역시 자존감을 높여주기는 힘들다. 내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혼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연애다. 진짜 연애. 진짜 연애를 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왜? 우선 누군가 나를 사랑하면 그 상대는 자신이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 사랑만이 유아시절 엄마의 사랑에 가장 육박한 사랑이다.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그 사랑. 동시에 나 역시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아이가 된다. 여자라면 상대가 어떤 절대자처럼 느껴질 테고, 남자에게 그 대상은 마치 여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짜 연애는 우리를 아이로 만들고, 동시에 우리를 아이로 만든 그 상대는 우리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선물을 준다.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받아든 그 선물 안에는 또 다른 선물이 들어 있다. 그 선물 안의 선물, 그것이 바로 자존감이다. 우리가 연애에 매혹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낮은 자존감을 끌어올릴 유일한 방법임을 직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연애는 분명 남는 장사다. 연애 그 자체로 우리를 설레고 즐겁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연애를 통해 삶을 행복하게 만들 자존감 역시 단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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