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도, 삶도, '몸의 논리'부터

자세 연습보다 스파링이 더 중요한가?

“왜 거울 보고 자세 연습을 해야 해요? 스파링하면 그 자세대로 안 나오잖아요. 차라리 자세 연습하는 시간에 스파링을 좀 더 하는 게 나은 거 아니에요?”


태권도를 수련하다가 복싱을 하게 된 친구가 물었다. 거울 앞에서 지겹게 자세 연습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는 복싱의 자세 연습이 실전에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태권도의 품세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친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자세 연습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서, 실전 상황에서 정확히 그 자세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정확한 자세를 익혔다고 하더라도, 실전 상황에서는 그 자세를 어느 정도 변형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원투’를 예로 들어보자. ‘원투’의 정자세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축을 기준으로 몸을 회전시켜 발생하는 구심력으로 타격하는 모양새다. 즉 머리(축)는 움직이면 안 되고 몸만 회전시켜서 타격해야 한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는 실전에서는 정확히 이런 자세로 ‘원투’를 치기 매우 어렵다. 백번 양보해서 매 순간 그런 정확한 자세로 ‘원투’를 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원투’를 칠 때 머리를 살짝 옆으로 옮겨주며 원투를 쳐야 한다. 실전 상황에서는 내가 공격할 때 상대 역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친구의 말처럼 자세 연습을 할 시간에 스파링을 하는 것이 복싱 실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거울을 보며 정확한 자세를 반복하는 연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 그런가? 자세 연습은 그 동작을 실전에서 똑같이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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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자세 연습은 ‘몸의 논리’를 익히는 연습이다.


다시 ‘원투’를 예로 들어보자. ‘원투’를 잘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뒷발이 지면을 밀면서 생긴 힘으로 골반을 회전시켜 발생한 힘을 팔로 전달하는 과정을 익힐 수 있어야 한다. 즉 뒷발에서부터 주먹 끝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체중이동 감각을 익힐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다. 복싱을 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몸의 감각을 익혀야 한다. 이러한 몸의 감각은 몇 번의 반복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몸의 논리는 생략을 허용하지 않는다.” 베르그손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몸(감각)의 논리’는 생략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수없이 반복하는 자세 연습이 필요하다. 생각이 많은 이들은 운동을 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겪곤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성(생각)의 논리’는 얼마든지 생략 가능하지만, ‘몸(감각)의 논리’는 어떤 생략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쉬운 것 같은 동작이지만, 막상 몸으로 실행하려면 버벅대는 경우가 얼마나 흔하던가.


새로운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일은 단 하나의 과정도 생략하지 않고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투’라는 ‘몸의 논리’를 익혔을 때라야 비로소 자유로운 스파링이 가능하다. 자신의 체중을 어떻게 이동시켜서 때려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면, 이제 얼마든지 자세를 변형해도 상관없다. 머리를 약간 옆으로 옮겨도, 그 상태에서 어떻게 체중을 실어서 ‘원투’를 칠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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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논리’를 모른다면, 타이밍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처럼 정자세를 연습할 시간에 스파링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세 연습 없이 매일 스파링만 했던 관원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많은 스파링 경험 덕분에 상황에 맞춰 적절한 타이밍에 ‘원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강도 높은 스파링을 할 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다가 링에서 내려오곤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회원은 때릴 수 있는 타이밍만 알뿐, 자신의 체중을 이동시켜 ‘쎄게’ 때리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스파링만 하던 관원의 펀치는 진짜 ‘원투’가 아니다. ‘원투’를 흉내 내는 일일 뿐이다. 복싱은 타이밍의 예술이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상대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이밍만 안다고 상대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데미지를 줄 수 없는 타이밍을 맞춘 주먹은 댄스일 뿐, 복싱이 아니다. 복싱은 본질적으로 상대를 때려눕혀야 하는 스포츠다.


태권도를 했던 그 친구가 정확한 자세 연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진짜 ‘원투’는 평생 익힐 수 없을 테다. 역설적이게도, 자세 연습 없이 스파링만 하려는 그 친구는 자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품새’ 연습만 하게 되는 것이지, 정작 ‘실전’ 연습은 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실전’에서는 체중이 실린 주먹을 낼 수 있는 ‘몸의 논리’를 익힌 상태 아래서 타이밍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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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이란, 기쁨의 ‘몸의 논리’를 익혀 기쁠 수 있는 타이밍을 포착하게 되는 삶이다.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복싱이 실전 상황 속에서 상대에게 데미지를 주는 게임이라면, 삶은 실전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이라는 실전이 주는 변수는 ‘링’이라는 실전이 주는 변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다단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타이밍만을 신경 쓴다. 지금이 여행할, 퇴사할, 이별할, 결혼할 최적한 타이밍인지만을 고민한다.


삶 역시 타이밍의 예술이지만, 여기에도 전제 조건이 있다.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싱에서 타이밍이 상대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하나의(물론 중요한) 조건일 뿐이듯, 삶에서 타이밍 역시 자신의 기쁨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아무리 타이밍을 잘 맞춘 여행(퇴사·이별·결혼)이었다 하더라도, 기쁨은커녕 슬픔으로 얼룩진 여행(퇴사·이별·결혼)으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데미지 없는 타이밍이 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기쁨이 없는 타이밍 역시 삶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몸의 논리’다. ‘쎄게’ 때릴 수 있는 ‘원투’를 몸으로 익힌 이게만 타이밍이 의미가 있듯, 삶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몸으로 익힌 이에게만 타이밍이 의미가 있다. 휴가 기간은 여행할 타이밍이다. 그런데 이 타이밍을 맞춘다고 다 기쁜 여행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일탈로서 여행이나 무의미한 여행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어떤 이들이 기쁜 여행을 할 수 있는가? ‘몸의 논리’를 알고 있는 이들이다. 나의 몸이 무엇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지에 관해 알고 있는 이들만이 기쁜 여행을 할 수 있다. 복싱을 할 때 가장 기쁘다면, 타이밍에 맞춰 체육관 여행을 하면 된다. 그림을 볼 때 가장 즐겁다면 타이밍에 맞춰 미술관 여행을 하면 된다. 음악을 들을 때 가장 즐겁다면, 타이밍에 맞춰 음악회 여행을 하면 된다.


복싱을 잘하고 싶은가? 먼저 거울 앞에 서서 끊임없이 자세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쎄게’ 때릴 수 있는 ‘몸의 논리’를 익힐 수 있을 때까지. 삶을 잘 살고 싶은가? 삶을 끊임없이 성찰reflection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기쁘게’ 살 수 있는 ‘몸의 논리’를 익힐 수 있을 때까지. 좋은 삶이란, 기쁨의 ‘몸의 논리’를 익힌 이들이 기쁠 수 있는 타이밍을 포착하게 될 때 이르게 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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